그가 남방을 산지는 10년도 더 되었다.
정장으로 출퇴근을 하던 회사를 그만 둔 이후로 여지껏 여름 남방을 산 적은 없었다.
그 동안 산 옷이라고는 산에 다닌답시고 등산복으로 마련한 몇벌의 짚티라던지 검정색
일색인 스판 바지 외에는 옷에 대해 별 관심도 가지질 않았고, 격식을 차리고 다닐 일도 그리 없었던 덕에,
왠만한 곳이면 시티웨어로서도 손색이 없는 등산복이 그의 주된 차림이었다.
괜찮은 로고가 박힌 브랜드의 등산옷을 아끼긴 해도 그걸 입고 외출할 때에는 어딘지 모르게 뿌듯한 기분을
느끼는 걸 보면, 그가 옷에 대해 그리 관심이 없다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고 턱없이 브랜드를 찾지 만은 아님이 빠듯한 살림에 다행이라면 다행이랄 수도 있었다.
어쩌다가 정장을 할 때 입는 옷들은 적어도 10년은 쑥 더 지난 것 들이 그의 옷장에 �곡히 걸려 있는 걸 보면 그의
쪼잔한 성격 탓 이기도 하거니와 옷들이 떨어지고 헤어지기는 커녕 지금의 유행과도 크게 달라 보이질 않는다고
그가 믿고 있는 것이 어쩌면 더 큰 이유일지도 몰랐다.
그런 그가 남방을 하나 산 것은 우연히 들른 스포츠 웨어 가게에서 자외선도 막아 주고 땀 흡수를 잘 하면서도
속건이 되는 꽤 괜찮은 남방이 눈에 쑥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가 기성복을 입을 때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결코 범상치 않은 몸인지라, 품이 맞으면 팔이 길고 팔이 맞으면 품이 작았던 것은 아랫배가 유달리 나온 것 외에는
예나 지금이나 별 바뀐 것은 없었다.
솜씨좋은 수선집이 있다는 아내의 전언이 있어, 내리쬐는 볕을 마다하지 않고 안양천 변으로 자전거를 타고가서 옷을 맡겼다.
‘어떻게 고치지…’ 하는 염려쯤은 ‘잘 고칠테니까 낼 오라'는 수선집 주인의 얘기에 적잖은 믿음을 가졌다.
*
새 옷을 입는다는 들뜬 마음으로, 수선집의 천장을 길게 가르고 있는 장대에 걸린옷을 까치발을 하며 직접 꺼내었다.
일에 바쁜 주인에게 꺼내 달라기 보다는 수선집 문턱을 넘어서자 마자 어제 맡긴 남방이 어디에 있을까 하며 벼르고 온 까닭에,
다른 옷들과 함께 깔끔하게 걸려 있는 그의 회색인 새 옷을 찾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에...
바삐 옷을 걸치자 마자 그는 뭔가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느낀 듯, 이내 미간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단추를 채우기는 커녕 이제 막 걸쳤을 뿐인데도 말이야…
그의 그런 느낌을 열심히 미싱을 돌리고 있는 수선집 주인은 그 땐 감지하지 못했다.
어제 맡기면서 팔길이를 자르데 있어, 예상되는 문제에 대해 당부를 해 두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그런 애뜻한 바램과는 상관없이 새 남방의 팔 소매는 아주 편하게 그냥 싹뚝 잘라져 나가 버렸다.
이음 부분의 매끈한 처리는 고사하고 그가 짧은 팔을 치켜드니 단추를 채운 소매 끝동이 팔뚝에 걸려 더 이상 올라가지
않으면서 깡총거린다. 얼굴로 더운 열이 금세 올라오고 있었다.
그제사 뭔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주인은, 난닝구와 다름없는 라운드 티한장 걸친 그에게,
'남방만 입으면 괜찮지 않을까' 하며 눈은 깡총해진 팔소매를 쳐다 보고는 겨우 말을 꺼내어 놓는다.
이미 팔의 많은 부분이 잘려져 나간 상태이긴 하나 그는 이마에 굵은 주름 몇개를 잡는 걸 잊지 않고,
제대로 수선 완료 후에나 연락을 하라며 단단하게 말을 새기고는 수선집을 나왔다.
*
“저으기…어디서 구입하셨는데요…”
“……”
“새거 사다 드릴께요…”
띵했다. 동시에 어떤 안도감도 함께 끼여서 그에게 슬쩍 지나치고 있었다.
“…아아니…, 수선비 몇 푼 된다고요….그라고 가게는 어떡하고, 그걸 사러 간답니까. 그러지 마시고…
다시 고치면........일단….저기…낼, 오후쯤 해서 들를께요.”
수선집을 나온지 한시간 뒤 쯤해서 걸려왔던 위 통화를 받고난 느낌이 유쾌했는지,
아니면 그 반대였는지… 익숙지도 않은 별 희한한 기운이 그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
“남, 사정 봐 줄꺼 뭐 있어”
월 마감한다고 늦게 들어온 그의 아내가 한마디 툭 던지고는 돌아 눕는다.
*
다시 찾아간 수선집의 열린 문을 들어서기 전에, 그는 어제 밤 아내의 말을 상기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주인이 건네 주는 돈을 바지 주머니에 쑥 집어 넣으며, 가게 문을 나오면서 그는 뒷통수가 아련해지는 느낌을
애써 떨쳐 내고자 자전거의 첫 페달을 힘있게 눌러 찍었다.
안양천변으로 내려 서서야 비로서 그는 호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집어 넣은 돈을 세어 보고는 지갑에다 돈을 꽂아 넣었다.
*
폭우가 내릴 거라는 날씨는 습도만 높을 뿐이었고, 흰구름이 듬성거리는 팔월 초하루 늦은 오후의
푸른 하늘은 열심히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있는 그의 머리 위에서 여전히 이글 거리고 있었다.
"아~ 더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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