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봄이 반갑지 않고 가는 겨울이 아쉽다. 그건 순전히 심설산행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이다. 어느 계절이고 산행이 안 좋으랴마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짙고 희미한 저편 능선 곳곳으로 불끈불끈 힘이 솟는 듯한 골격을 그대로 드러낸 채, 흰 눈으로 덥혀있는 겨울산이 난 좋다. 연인산을 간다. 남녘의 봄 소식이 모락모락 피워 나는 이 즈음에도 그 곳의 빛 귀한 서,북사면은 늘 인적이 없어 호젓하기 이를데 없기도 하고 지난 겨울 그대로의 흔적을 왠만큼 간직하고 있어 춘삼월의 심설 산행 코스로 진작부터 눈여겨 두었었다. 전날 도심으로 비가 내린 터라 천미터를 상회하는 고산으론 눈이 내렸을게다. 겨우내 켜켜이 쌓인 적설임을 고려해도 대략 10Km 정도는 5시간이면 충분하리라고 일행들에게 미리 얘기를 해 두었다.
간밤에 도심으로 내린 비는 외진 상판리 마을에선 온통 눈으로 변해있었으며 귀목고개를 오르는 서사면은 기대 이상의 신설이 두껍게 내려 앉았다. 눈은 발목으로 잠겼고 무릎으로도 잠겼다. 고도를 높여나가자 허리로도 잠겼다. 예기치 않게 고개를 우회하여 올라선 연인산 북사면의 방화선으로는 몸이 휘청일 정도로 쉴 새없이 서풍이 몰아치고 있었으며 왼편으로는 커니스(눈처마)를 길게 세워두었다.
갈지자 걸음으로 적설이 덜한 곳을 살피려 하나 이게 맘뿐이다. 딛지 않고는 모르겠다. 허리로 잠긴 신설을 무릎으로 밀어낸다. 강풍에 휘날린 분설은 우측 뺨을 핣키며 저쪽 겨울 숲으로 달아난다. 게을러 터진 손으로 벗겨진 후드를 뒤집어 쓰며 고무 스트링을 바짝 당긴다. 허나 이내 또 다른 바람 놈이 그 마저 제껴 버리고는 윙윙 울어대며 이리저리 두리번 거리다 앙상한 겨울 가지 끝으로 탐스럽게 달라 붙은 서리꽃을 마저 떨어낸다. 머리 위로 어깨 위로 떨어지는 서리꽃이 후두둑 거린다. 간편하게 준비한 장갑의 손가락 끝으로는 진작부터 얼음이 박혔다. 주먹을 불끈 쥐락펴락하다가 사타구니 사이로 몇 번 비벼댄다. 혹한에 사용하려 벽장에 고이 모셔 두기만 한 벙어리 장갑 생각이 간절하다. 천근만근이나 되는 듯한 걸음걸이로 더운 김 푹푹 개어 올리며 연신 곡소리 터져 나온다. 그러면서도 다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디카질은 빼먹지 않는다. 육신은 고되나 눈은 즐겁다. 그러니까 다들 엄살이었다.
애초 계획한 하산완료 시간인 5시간도 더 지나서야 산정으로 섰다. 온 사위 거침없이 펼쳐지는 이 고지 저 능선을 두루두루 더듬는다. 그 때 그 시절 그 힘겨웠던 발걸음의 기억들을 되새기며 이산 저산 그리고 온 산들을 가슴 깊이 들이킨다. 눈이 깨끗해지고 머리가 맑아오며 가슴이 벅차오른다. 오랫동안 산정을 서성이며 게으름 피운다. 하산... 진 종일 설산을 헤매느라 고단한 발 걸음보다 산정에 두고 오려는 마음을 내리는게 더 힘들다.
정상을 바로 꺾어 내리는 서사면을 내리다가 눈 속에서 오도가도 못한다. 눈에 푹 잠겨 미끄러져 내릴 때야 좋았는데 급 사면을 내리려 일어서니 미련한 몸뚱아리는 한 자는 더 깊이 눈 속으로 박힌다. 심설의 즐거움과 두려움이 온 몸을 휩쓸고 지나가는 동시에 등줄기로 서늘한 기운 하나가 가늘게 흘러내려 꼬리를 빠져나간다. 하반신은 잠겼으나 발은 허공으로 떴다. 되돌아 올라 가야겠다. 허나 그건 마음 뿐. 다시 오르려니 발은 두텁게 쌓인 신설 위의 허공을 헤적인다. 잡아 챌만한 나무는커녕 간신이 움켜 쥔 희미한 검불은 아무런 버팀이 되어 주질 못하고 허리가 끊어진 채 손아귀로 딩군다. 큰 걸음 떼려 용을 쓰자 다리가 뻐근해져 온다. 가만이 선 채로 애타게 구조를 외치나 말은 나오지 않았다.
춘삼월... 봄은 봄인데 봄이 아니었다. 5시간이면 충분하리라 여긴 산행은 8시간도 더 걸렸다.
*
청평역에서 08:30에 발하는 현리향 버스를 기다린다.
건너편 호명산으로 눈꽃이 한창이다.
현리에서 09:20에 갈아탄 버스의 차창 밖은 온통 눈꽃 천지였다.
10시 못 미쳐 도착한 상판리에서 귀목고개로 가는 길목.
일행.
저으기는 귀목고개.
그 직전, 우측의 아재비고개 방향으로 꺽었다.
이번 겨울 들어 눈산행은 여러번 했어도 눈 꽃은 춘삼월이 되어서야 본다.
막 지나간 2개의 발자욱이 신설 위를 찍고 있었다.
늘 한적하기만 이 등로에 우리말고 또 누굴까.
은세계.
겨울 숲으로 바람이 불었다.
눈 꽃이 우수수 떨어지고 분설이 날린다.
눈무게를 이기지 못해 등로로 늘어진 잡목들이 터널을 만들고.
입산 30분 후 드래골 계곡의 얼음장 밑으로는 물소리가 경쾌했다.
개울건너 좌측 저편이 등로일 것 같은데
선행자의 발자욱은 우측으로 찍혔다.
잠시 고민하다가 발자욱을 따랐다.
'분명 산꾼일꺼여...'
발자욱은 능선으로 연결되었다.
'어 아닌데, 골을 따라 한참 가야할텐데...'
그렇게 10여분 올랐나.
다시 돌아갈까 하던 참에, 어느 부부가 내려온다.
길이 없다나.
'어떻하나...'
그래, 이왕지사... 그대로 가는거야.
잠시 벗어난 능선을 다시 틀어 앞을 연다.
'방향은 맞으니까 1차 목적지인 아재비고개 위쪽인 연인산으로 오르는 북릉으로 닿겠지'
설사면은 점점 깊어져가고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그 전, 앞선 두 발자욱의 주인이었던 부부 산객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뒤돌아 갔다.
이걸 보니 등로는 맞아.
지도는 점선으로 연결된, 그러니까 샛길로 표현되는 듯.
설릉으로 분설이 굴러다닌다.
적설은 점점 깊어져 가고...
무릎으로 눈을 밀어내며 간다.
눈이 덜 쌓인 곳을 찾아 갈지자 행보를 하건만
발을 딛기까지는 눈이 어느 정도 쌓였는지 모른다.
고도를 높일수록 느닷없이 허리까지 빠지기도 수 번.
바람의 흔적으로 곳곳이 커니스(눈처마)다.
상판리에서 아재비 고개마루까지 당초 1시간 반을 예상했었다.
허나 그건 통상의 적설일 경우이고
온 사방이 눈 천지로 황홀함에 빠져 디카질이 바쁘기도 했거니와
깊은 적설로 둔해진 발걸음으로 인해 예상 시간은 의미없었다.
쓰러진 나무가 원 등산로는 아니었으리라.
허나 뒤를 따르는 일행들은 뭔 죄여.
애고 난들 그러고 싶었겠어.
긴가민가하며 드디어 올라선 연인산 북릉의 방화선.
아재비 고개는 바로 아래이고 그 뒤는 명지산으로 오른다.
북릉의 넓은 방화선을 따라 연인산으로 향한다.
오름길 나무가지의의 눈꽃은 이 곳엔 서리꽃으로 피었다.
기온은 뚝 떨어지고 매서운 서풍이 사정없이 불어치더라.
그 나마 발이 덜 빠지는 길을 찾는다.
해서 어쩔 수 없이 갈지자 행보를 한다만.
바람이 매섭다.
바람이 빗은 작품.
잠시 바람을 피하며 쉴 곳을 찾아 이동 중.
오름길 좌측인 동으로 쌓인 커니스는 빠지면 한 길 이상 되는 눈둑이 길게 늘어서 있다.
그래도 이 경치는 보고 가야쥐 ~
저 편 하늘 아래의 화악산.
운악산이 보인다.
허벅지까지...
문바위에서.
드디어 저편 마지막 오름의 끝은 연인산이다.
뒤편 북쪽의 명지산.
마침내 연인산정에 서다.
상판리에서 5시간도 더 걸렸다.
중앙으로 보이는 귀목봉과 우측의 명지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오름길.
서남쪽의 노적봉, 칼봉...
남으로 좌 우정능선과 중앙의 운악산.
북쪽의 명지산과 우측의 화악산,응봉.
동북방향의 화악산과 응봉을 주밍.
날씨 덕에 온 사위의 조망으로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더라.
정상에서 최단 코스인 상판리의 생수공장 쪽으로 하산하려다가
눈이 깊어 다시 올라오려는데...
급사면을 걷느니 차라리 눈 위로 앉아 10여 미터 미끄러 졌던가.
일어서자 눈이 허벅지로 잠긴다.
한 걸음 떼자 허리까지 올라온다.
위에서 멀뚱히 내려다보는 일행.
"어떡하까요. 능선만 타면 되는데..."
뱉은 말과는 달리 마음의 두려움이 앞섰다.
'그래, 빽하자.'
' 어, 이게 아닌데...'
다시 오르려 발을 디뎌도 이내 눈이 허물어져 제 자리다.
더 위쪽으로 발을 옮기려 용을 쓰자, 허벅지로 뻐근한 경직이...
그대로 선 채로 잠시 호흡을 가르며 몇 번이나 시도를 하나
여전히 스스로 눈 구덩이를 벗어날 재간이 없더라.
스틱을 건네 당기면서 간신이 마의 구간을 벗어났다.
백둔리의 6시 버스는 빠듯할 듯.
마일리의 6시반 버스로 결정하고는
반대편으로 러쎌이 잘 되어있는 연인능선으로 내린다.
산판길.
우정고개.
마일리 국수당.
중앙의 뾰족 봉우리는 매봉.
마일리 종점에서 6시 반 버스를 탔다.
*
<교통편>
갈 때 : 상봉역 07:27 --> 청평역에서 08:30 현리행 버스 --> 현리 09:20 상판리행 버스.
올 때 ; 마일리 06:30 현리행 버스 --> 청평역행 버스및 청량리행 광역버스 다수.
<산행경로>
상판리 종점 --> 아재비 고개 --> 북사면 --> 연인산정 --> (다락터 생수공장 ; 코스변경) --> 연인능선 --> 우정고개 --> 마일리 종점.
'登'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의 전문가, 클라이밍으로 업그레이드 하다. 120414 (0) | 2012.04.15 |
---|---|
몽벨 UP GRADE 팀 활동에 대한 단상. (0) | 2012.04.06 |
귀한 경험을 한번에 다 겪다. / 북한산 운해와 보현봉 120317 (0) | 2012.03.17 |
온 몸으로 길을 열다. 그리고 어떤 단상하나. / 석룡산 ~ 화악산. 120310 (0) | 2012.03.11 |
... 그래서 바다 위에 뜬 산이라고 했는가 보다. / 상해봉~광덕산~박달봉. 120219 (0) | 2012.0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