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벌초길
차창을 때리는 비가 드세다.
대전통영간 고속국도를 달리면서 덕유산 아래를 지나쳤고
운무에 걸린 지리산 자락도 멀찌감치 시야에 들어왔다.
서진주 톨게이트를 빠져 나올 무렵의 맑은 하늘이 반갑다.
송림 소점골 도착은 출발 후 5시간 만이었다.
방류하는 남강댐
벌초.
예초기 조립을 하자마자
먹장 구름이 몰려 오더니 도저히 그칠 것 같지 않도록 세차게 비를 뿌렸다.
그렇게 십몇분 간 퍼붓던 하늘이 다시 맑아지는가 했는데, 또 다시 소나기를 퍼 부었다.
그러다가 그치면서 이내 맑아지고...
무려 3번이나 이 짓이 되풀이 되었다.
뿌렸다 그쳤다.
그쳤다 뿌렸다.
또 뿌리고 그치고,
또 다시 그치고 뿌리고
.
.
.
벌초를 마칠 무렵, 온 몸은 비에 푹 젖었다.
2. 진주 투어
심하게 굽어지던 산길을 오르다 돌 하나가 차 바닥을 긁고 다닌다.
이튿날 일요일 오전, 수리를 위해 진주로 나왔으나 정비소는 죄다 문을 닫았다.
마후라 소리가 요란하긴 해도 하는 수 없다.
진주에서 유명한 비빔밥집 천황식당
인근 중앙시장내 제일식당과 쌍벽을 이룸.
진주비빔밥의 특징은 고명으로 육회가 얹히는 거는 전주비빔밥과 같으나
내장을 넣은 선지국이 밥 그릇에 담겨져 나오는게 콩나물 국이 나오는 전주비빔밥과 차이라면 차이다.
(통상 국그릇은 넓고 높이가 밥그릇보다는 낮다. 그런데 제일식당이나 천황식당이나 밥 그릇에 국이 담겨져 있는게 늘 생경했다)
인근 진양호를 갔다.
3. 鳳鳴山 多率寺
다솔사(多率寺)는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의 봉명산에 위치한 사찰이다. 다솔사가 위치한 봉명산은 와룡산으로도 불리며, 불교식 이름인 방장산이라는 별칭도 있다. 조계종 제14교구 본사 범어사의 말사이다. 신라 지증왕 4년인 503년에 승려 연기(緣起)가 창립했다는 전설이 있다. 당시의 이름은 영악사(靈岳寺)였다. 다솔사(陀率寺)로 이름이 바뀐 것은 선덕여왕 5년인 636년이다. 이때 자장율사가 건물을 새로 지었다. 신라 문무왕 16년인 676년에는 의상이 영봉사(靈鳳寺)로 개칭하였고, 신라 말기에 도선이 증축하면서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방장산의 형국이 대장군처럼 "많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있다"(多率)는 의미에서 다솔이라 했다는 이야기 전한다. 고려 말에 나옹이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 중 대양루는 조선 숙종 때 중건하면서 지어진 것이고, 나머지 건물은 19세기 이후에 세워졌다. 일제 강점기에 항일 승려로 이름이 있던 한용운과 최범술이 기거해 유명해졌고, 김동리는 다솔사 야학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소설 〈등신불〉을 썼다. 경상남도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문화재를 4점 보유하고 있다. 18세기 양식의 누각인 대양루와 응진전, 극락전, 그리고 다솔사 산하의 보안암 석굴이다. 일주문이나 천왕문이 없고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사찰 뒤편에는 차밭이 조성되어 있다.
大陽樓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
창으로 보이는 부도에 진신사리를 모셨다.
法鼓
근심을 털어내는 解憂所
대양루 우측 풍경
4. 2번국도를 따르다.
경전선이 지나가는 북천역은 코스모스역으로 유명하다.
진주에서 하동으로 가는 2번 국도변의 북천은 가람 이병주의 고향이다.
이제 막 피기 시작한다.
아마 추석 무렵이면 만개할 듯.
북천역앞의 풍경.
인근의 너른 메밀밭으로 꽃은 보이지도 않더라.
8,9월 예년에 비해 비가 너무 많이 내렸다.
5. 구례 운조루
운조루(雲鳥樓) 소개 류응교 교수
중요민속자료 제8호 소재지 :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이 집은 조선 영조 52년 (1776년)에 당시 삼수 부사를 지낸 류이주 (柳爾胄)가 세운것으로 99간 (현존73간)의 대규모 주택으로서 조선시대 선비의 품격을 상징하는 품자형 (品字形)의 배치 형식을 보이고 있는 양반가이다.
류이주는 그가 처음 이사와 살았던 구만들 (九萬坪)의 지명을 따 호를 귀만 (歸晩) 이라했으며 이 집을 귀만와 (歸晩窩) 라고도 불렀다. 운조루라는 택호는 <구름속의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란 뜻과 함께 <구름위를 나르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란 뜻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본디 이집의 이름은 중국의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 에서 따온 글 이다.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 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 오네>의 문구에서 첫머리 두 글자를 취해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운조루는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와 함께 내수구(앞 도랑)와 외수구(섬진강)가 제대로 되어 있는 명당터에 자리잡고있다.집 앞의 오봉산은 신하들이 엎드려 절하는 형국이라고하며, 연당은 남쪽의 산세가 불의 형세를 하고있어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조성한것이라고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일대는 금귀몰니 (金龜沒泥), 금환락지 (金環落地), 오보교취 (五寶交聚), 혹은 오봉귀소 (五鳳歸巢)의 명당이 있는 곳이라고 하며, 이 집터에서 거북이의 형상을한 돌이 출토되었기에 금귀몰니의 명당으로서 남한의 3대 길지로 알려져 있다.
운조루에는 바깥사랑채, 안사랑채, 아랫사랑채 등으로 각각 누마루가 있었으 나 지금은 아쉽게도 안 사랑채와 아랫 사랑채의 누 마루는 남아 있지 아니하다. 현재 이 집은 건 평 129평 으로 一 자형 행랑채와 북동쪽의 사당채를 제외하고 T 자형의 사랑채와 ㄷ 자형의 안채, 안마당의 곡간채가 팔작지붕, 박공지붕, 모임지붕으로 연결되어있는 일체형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 집에있는 목독(나무로된 쌀독의 마개에 <他人能解>라는 글귀를 써두었음)은 가난한 이웃 사람이 쌀을 꺼내 끼니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음덕을 베풀고 적선을하는 것이 돈을 가진 자의 도리임을 보여 주었던 류씨 문중의 상징물이다. 200년이 지나도록 망하지 아니하고 오늘날까지 가문이 번창한 것은 오로지 분수를 지키며 생활하고,이웃을 돌보았던 마음이 전승 되어 내려왔기 때문이라고본다. 류이주의 5세손인 류제양(柳濟陽)은 일만여편의 시(詩)를 쓰고 손자 류형업(柳瀅業)에 이르기까지 80년간 하루도 빠지지않고 생활일기와 농가일기를 썼다는 점이다.
영조52년(1776년) 대구출신의 무관 류이주가 세운 운조루.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3대 길지 중의 하나인 金環落地 형이라 소개한다.
또한 金龜沒泥 형도 함께 갖추었다고 한다.
金環落地 ; 선녀가 목욕을 한 후 하늘로 올라가다가 금가락지가 떨어진 곳.
金龜沒泥 ; 금겁북이가 진흙 속에 숨어 있는 곳.
五寶交聚 ; 5가지 보물이 숨겨져 있는 곳
운조루 앞의 蓮池.
案山인 계족산의 화기를 잠재우기 위해 비보압승풍수에 의해 연못을 팠다고 한다.
노블리스오블리제의 표본 雲鳥樓.
솟을대문을 들어서자 왠 노인 한 분이 주섬주섬 눈치를 보더니 천원을 받는다.
페인트 칠이 벗겨진 낡은 간판에 입장료를 징수한다며 대문 뒤의 의자 위에 세워뒀다.
매표소도 없었고 영수증은 물론 없었다.
쌀 두섬 반이 들어가는 '他人能解'라는 쌀 뒤주.
춘궁기 때 누구나 아래쪽의 마개를 열고 쌀을 퍼 갈 수 있게 했으며
뒤주의 위치도 주인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두었다.
행여 퍼가는 이가 눈치를 볼까봐...
연말에 뒤주에 쌀이 남아 있으면 하인들은 주인으로 부터 꾸중을 들었다고 한다.
6.25전쟁을 거치면서도 운조루는 불타지 않고 살아 남았다.
전쟁은 좌우익 간의 이데올로기 싸움 이전에 일제 치하 이 후 해방을 맞으면서
오랜 세월 동안 착취와 핍박을 받았던 소작인들의 입장에서는 해방전쟁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지리산은 전쟁 전 후에 걸쳐 빨치산의 활동이 그 어느 곳 보다도 활발했던 곳이다.
왠만한 지주의 집들은 이 시기에 거의 불에 타 버렸다.
허나 자발적으로 또는 어쩔 수 없이 산으로 들어간 소작인들은
대를 이어 운조루의 은혜를 받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한다.
격동의 세월을 거치면서 버텨온 雲鳥樓를
그냥 그런 길지나 고택으로만 바라 볼 수는 없을 듯 하다.
마루로 스며드는 햇살 끝으로 백운산 자락인 오봉산이 늘렸다.
그 아래로는 섬진강이 흐른다.
허물어진 않았으나 제대로 관리가 잘 안되고 있더라.
사람이 살지 않아 그런지도 모르겠다.
6. 화엄사
緣起庵
연기암을 창건한 것은 인도의 승려 연기조사 이다
그는 어머니를 모시고 이곳 지리산에 들어 화엄의 가르침을 널리 선양하였는데 그 맨처음 자리잡은 곳이 바로 이곳 연기암이었다. 그 후 화엄사를 창건하고 다시 연곡사, 대원사, 귀신사 등등 지리산 곳곳에 사찰을 열어 화엄사상을 널리 폈다.
본디 스님께서는 인도의 승려로서 문수보살께 화엄의 가르침을 널리 펴겠다는 원을 세우신 분이다. 그리하여 멀리 타국으로 건너와 당시 크게 번영했던 국제도시 경주의 황룡사에서 경을 설했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비몽사몽간에 한 모자를 만났는데 후덕해 보이는 여인의 손을 잡고 따라온 귀여운 동자가 이렇게 말했다 한다. "본디 스님께서 제 앞에서 세운 願은 널리 화엄의 가르침을 펴는 것이었는데 어찌하여 새 인연처를 찾지 않으십니까?"
연기스님이 놀라 다시 바라보니 두 모자는 홀연히 사라지고 없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연기스님은 새 인연처를 찾게 되었는데 문득 지리산에 들게 되었다. 여기저기 아름다운 산천의 경계에 취해 앉아 있는데 멀리 바라다 보이는 지리산 봉우리들이 문득 한 부인의 모습처럼 보이는게 아닌가.. 다시 잘 살펴보니 예전 비몽사몽간에 만났던 바로 그 모자 가운데 부인의 모습이었다.
연기는 그때서야 문득 느끼기를 '그래 이곳이 본디 성모산이라 하니 그 부인의 형상은 바로 이곳 지리산을 말함이었구나...'
결국 연기스님은 어머니를 모셔와 그 부인의 형상을 본 산등성이에 조그만 암자를 짓고 처음으로 지리산에 자리잡았으니 바로 연기암이었다. 그 후 연기스님은 직접 친견했던 지리산 문수보살을 원불로 삼아 널리 화엄일승지도를 폈으니 그 아래 삼천제자가 있어 또한 가르침을 이어나감에 지리산은 화엄의 꽃이 활짝 편 연화장세계가 되었다.
이 암자를 복원할 때 쌍조문의 암막새와 연꽃문양의 숫막새 기타 청자편, 백자편등이 출토되었는데, 이중에서 특히 쌍오문(雙鳥紋)의 암막새는 남원 만복사지에서 출토된 것과 거의 유사하여 그 연대추정에 참고가 된다. 또 청자편과 백자편의 문양으로 보아 그 연대를 통일신라말 이상으로 추정하게 되었으니 대부분의 화엄사 소속암자들의 창건이 조선시대 후반기인 18∼19세기인 점에 비추어 볼 때 연기암의 창건은 화엄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그 연대가 통일신라말 이전으로까지 올라가게 되는바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 연기암 홈페이지에서 -
緣起庵
일주문을 들어서자 우측으로 연기암을 오르는 길이 있다.
무려 10여분 이나 꼬불꼬불한 산길로 차를 몰은 후에야 연기암에 도착한다.
유려한 'S'자를그리는 섬진강이 보인다.
문수전.
문수보살 상이 서있다.
국내최대의 문수보살상
연기암으로 오르는 산길 옆, 지리산 계곡 상류의 거센 물살
화엄사로 간다.
30년 전 즈음의 팔월 말 늦은 오후,
화엄사 경내를 통과하여 노고단을 올랐다.
계곡 옆 어딘가에 홀로 텐트를 치고 내 손도 안보이는
그야말로 칠흙같은 어둠 속에 홀로 길고도 긴 밤을 새웠다.
花葉不相見이라는 '꽃무룻'
화엄사를 빠져 나오다가 매표소 바로 앞에서 급히 차를 세웠다.
불공을 드리러 왔던 여인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만 보던 젊은 총각스님.
허긴 노스님도 총각이긴 하다.
어쨌던,
다가서지 못하고 마음으로 이는 그 정열을 다 어쩌지 못하다가 상사병이 깊어 숨을 거둔다.
스님이 죽은 그 자리에 피어난 꽃 한송이, '꽃무릇'(일명 석산)
꽃이 필 때는 잎이 없으며 꽃이 지고 난 후에 잎이 나온다.
이 사마귀 처럼 호랑나비를 확 낚아 채었다면,
그 스님의 애잔한 스토리는 그렇고 그런 '로맨스멍크'가 되었을꺼여.
주마간산으로 훑은 절집을 빠져 나온다.
7. 전주 비빔밥
맛은 있는데 11,000원은 비싸다.
진주비빔밥은 7,000원.
구례에서 17번 국도를 타고 전주까지 와서야 고속국도를 탔다.
*
어느 곳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소중한 문화유산을
그야말로 주마간산 격으로 둘러본 게 괜한 짓이라 여겨지는 마음 한 켠이 불편하다.
'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주 투어 1107031 ~ 110804 (0) | 2011.08.07 |
---|---|
변산 마실길을 걷다. 110423 (0) | 2011.04.24 |
화악산 삼일계곡 가는 길 100803,4 (0) | 2010.08.05 |
연... 농익은 여름의 화신. (0) | 2010.08.05 |
소래 생태공원. 100523 (0) | 2010.05.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