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저리 굽이치는 사면을 훑어 오르는 남한산성으로 가는 9번 버스 안에서 부터 객의 마음은 그리 개운치 못했다.
그건 피가 끓던 군 시절에 인생의 막장으로 이르게 하는 잿빛으로 회자되던 군 형무소가 있던 곳이라는 기억들과 병자호란 시 항쟁이라고 하기에는 초라하기 이를데 없이 스스로 성안에 고립되어 저절로 허물어져 버렸을 47일간의 절망과 그 후로 이어지는 치욕의 편린들이 산을 두르는 성벽의 곳곳에 걸려 있으리라는 칙칙한 그림이 마음 어느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는 않았으리라.
<남문 앞에 있는 역대 수어사들의 공덕비>
<남문 /'至和門' , 유교사상이 팽배한 그 땐 굴욕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斥'이 아니라 '和'였다>
<남문(至和門)을 따라 나선 성곽 길 옆으로는 소나무 숲이 길게 이어진다>
버스에서 내려선 남문으로 이르는 길옆으론 성의 수비를 책임졌을 역대 수어사의 공덕비들이 늘어서 있었다. 철갑을 두른 장대한 남문의 홍예문 바깥 쪽으로 두 그루의 거목이 먼저 눈에 찬다. 성은 넓직한 산책로로 산을 온전하게 한바퀴 빙 둘러 내고 있기는 하나 성곽으로 바짝 붙은 교통로를 따르기로 한 것은 산책보다는 여행, 그 시절 그 겨울에 있었을 흔적들이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살며시 되 피어 올라, 그 날의 작은 여운이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 흩뿌린 눈이 미처 쌓일 새도 없이 3월의 햇살에 무너져 내려 성 내곽으로 휘감아 흐르는 오르내림 길을 질척이게 하여 다소 걸음이 성가시기는 하나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산세의 오르내림에 따라 축성된 城은, 안쪽은 편평한데 비해 성밖의 경사는 빠르다 >
남문에서 올라서는 성벽의 길 옆으로는 제법 아름이나 되는 늘 푸른 소나무들이 성곽을 따라 숲을 이루고 있어 산길 여기저기엔 갈비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것이 대부분의 산들이 잎사귀 넓은 참나무 류들로 잠식되어 사시사철 누른 잎들이 잔뜩 산길을 메우며, 심하게 틀어진 채 위태로이 서있던 앙상한 나목들의 황량한 분위기와는 자못 다르다.
성곽을 어우르는 중에 간간이 들리는 딱총소리는 공원관리소에서 넣는 음향효과였을까. 그렇다면 그게 공성하는 청병의 화력이었다기 보다는 바람을 막아 줄 변변한 옷 한 벌 없이 추위와 오랜 허기에 지쳐 마지 못해 응사하였을 조선병의 화력이었으리라고 여긴 것은, 적에게의 치명상은 커녕 나무가지에 앉아 있는 새도 잡지 못할 정도의 아무런 힘조차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
<공기내에 끝내지 못한 축성이 축재라는 모함으로 처형(1624, 인조 2년) 당한 李晦와 자결한 애첩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세운 청량당 >
<수어장대의 팔작지붕이 뒤로 보인다>
<수어장대(西將臺)>
청량산의 정상인 서장대(수어장대)에서 피아의 군세를 살피며 조선군을 지휘하였을 왕과 휘하의 군신들이 가진 희망과 절망의 크기는 어찌할 것이며, 기나긴 동지섣달을 변변한 먹을 것과 입을 것도 없이 출성은 커녕 수성 조차 어려웠을 현실 앞에서 결사항쟁 뿐이라는 명분과 그에 맞서 찢어진 항서를 다시 붙이고는 지는 것이 곧 이기는 것이라는 실리. 척화와 주화,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구하고자 하는 그들의 고뇌의 끝은 다름이 아닌 하나가 되어 이 성안 어딘가에 걸려 있을 것 같았다.
<청량산의 꼭대기에 자리한 전망 좋은 서장대(수어장대)는 조선군의 총지휘소 였다>
<수어장대 담장 아래의 청량당>
서장대 바로 아래엔, 축성이 미진하여 억울하게 처형당한 이회의 영혼을 달래는 굳게 닫힌 청량당으로 봄 햇살이 쓰윽하며 담장을 넘어 가고 있었다.
<아파트 숲이 희미하게 내려다 보이는 총안을 통하여 당시 허기진 조선병사의 시선은 너른 평야에 듬성듬성 쌓여진 노적가리는 아니었을까.>
아파트 숲이 빼곡히 자리한 것이 뿌옇게 내려다 보이는 성벽의 총안에서 조선병들은 청병 진영에서 피어 오르는 저녁 무렵의 하얀 연기를 내려다 보며
유린된 내 땅에서 미처 거두지 못한 내 식솔들의 안위를 더 염려했을까 아니면 성안에서 겨우 명을 이어가는 나 보다는 못하지 않으리라는 어떤 기대
로 이 전쟁이 끝나기 만을 손 꼽아 헤아리며 밥 한술 떠 먹고는 따뜻한 아랫목에서 바지 끈 풀어 늘어지며 한 잠을 자는 꿈을 꾸고 있지는 않았을까.
<城은 흐르는 산을 따라 여러 번 굽이쳤다>
<성밖으로 은밀한 출입을 하였을 암문>
성곽은 여러 개의 암문(暗門)을 내어 은밀한 출입을 하게 하였고 군포(軍鋪)라 일컬어 지는 초소엔 흐릿한 흔적만이 병영의 위치를 알리고 있었다. 지휘소인 동장대터를 따라 이어지는 성은 가끔 본성의 외곽으로 축성된 항아리 모양의 옹성(甕城)과 낮은 담장인 여장(女墻)으로 수성만이 전부가 아닌 때로는 쉬 출성을 하게끔 하는 공격적인 구조로 갖추어져 있었다.
<성 외벽의 한켠으로 봄은 막바지 겨울을 밀어 내고 있었다>
성은 산의 지형을 따라 여러번 휘감으며 오르내림을 하였고 물러서는 겨울의 끝자락이 숨어 있는 성곽의 북사면에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 들고 있었다.
<攻城이 그리 만만치는 않았으리라>
성곽은 가끔 옹성이 외곽으로 축성되어 때로는 공격적인 구조였다.
<본성의 외곽으로 돌출되어 보다 적극적으로 적을 치기 위해 쌓은 항아리 모양의 甕城>
<守城을 하는 병사들도 효과적으로 적을 공략하기 위해 낮게 쌓은 女墻으로 忍苦의 세월이 내려 앉았다>
<옹성 안쪽의 성벽에 묻은 세월>
동문 앞은 성남에서 광주로 잇는 산성을 가르는 도로가 있어 차량은 연속으로 이어지고 성벽은 도로를 건너 산을 따라 빠르게 올라서고 있었다. 지휘
소인 남장대는 외곽으로 돌출된 3개의 옹성을 내려다 보면서 작전명령을 신속히 하달하도록 하였으나, 항서를 들고 성을 나서는 왕의 행렬을 바로 그
곳에서 바라봤을 것 같은 조선 특공대의 무너지는 그 마음을 어찌 달래려 하는가.
봄빛이 완연한 남한산성의 성곽을 거닐면서, 370 여년 전의 치열하였을 그 겨울을 잠시 더듬으며 산성종로의 버스승차장으로 내려서는 성남의 창공으로는 흰 꼬리를 그리는 전투기가 여러 차례 날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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