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장 비밀번호를 첨에 만들 때 나름대로 고민 꽤나 했다.
혹 어느 누군가 이런저런 사유로 내 통장을 손에 넣어 우연히 누른 비밀번호가 들어 맞아 돈을 모두 다 빼내버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0개 중에서 4개의 숫자를 뽑아 내어 섞는 작업은 어려운 일이었다.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많을 때는 거의 기백만원이 한꺼번에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은 지금도 여전히 있어, 현금 인출기에서 5만원 가량의 용돈을 빼 낼 때는 내 행동거지가 그리 자연스럽지 못한 것 같다.
어느 통장이 있다.
이 통장의 비밀번호는, ‘0000’ 이다. (실제로 숫자 ‘영’이 4개다)
잔고가 수 억원 이다.
또 다른 통장의 비밀 번호도 공교롭게도, ‘0000’이며 이 통장의 잔고는 몇 십억 까지라고 한다. 통장의 예금주는 다르다. 그 많은 돈이 들어 있는 통장의 비밀번호가 아주 간단하게 만든 자의 배포(?)가 보통이 아니다. 그런 똑 같은 비밀번호를 만든 자들이 수두룩하단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느 통장의 비밀번호는, ‘1111’ 이며 또 다른 명의의 통장도.’1111’ 로 되어 있다. 들어 있는 돈들도 내가 신문지에 낙서 삼아 그릴 수 있는 숫자의 돈으로, 작게는 수억에서 많게는 수십억이 들어 있다고 한다.
인출되는 금액은, ‘3억8천5백4십9만3천7백4십2원’ 식 이다.
만원 단위로 돈을 빼내는 나와는 달리, 내 보다 수 백배나 많은 돈을 가진 자들이 1원 단위까지 인출한단다.
이 쯤 되면 쪼잔함의 극치는 이미 쪼잔함이 아니다.
참말로 희한한 금융 거래다.
더군다나 한 가지 더 까무라칠 일은,
이런 통장들이 현재까지만 무려 3,800 여 개가 있으며 이 보다 더 많이 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삼성 비자금과 관련하여 특검팀에서 조사 중인 내용의 일부 들이다.
전현직 삼성 임직원인 예금주들은, 통장의 돈은 차명계좌가 아니라 모두 자신의 돈이라고 한다.
이것만 가지고는 3,800 여 개의 수천억원에 이르는 돈들이 차명계좌로 조성된 비자금이라는 증거는 안 되는 걸로 안다.
수사에 협조를 아끼지 않는다는 공연한 얘기를 미리 해 두고는,
한결같이 자신의 계좌라고 주장하는 그들은 자신의 자식들에겐 어떻게 가르쳐 왔을까.
‘잘했다고’ 머리를 쓰다 듬으며 주인이 던져 주는 먹이를 낼름 받아 먹고는,
오늘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아픈 마음을 생각하는 내 마음이 더 아프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2/20/200802200093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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