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왕산 심설산행

강기한 2007. 8. 10. 11:08

 

밤새 뒤척였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1시가 쑥 지나 잠을 청했으나 쉽사리 잠은 오지 않는다.

머리 맏에 둔 디지털 시계가 2,3,4를 계속 찍고 있는 걸 시간 간격을 두고 본다.

5를 찍을 때 쯤에서야 아예 자기를 포기했다.

 

음성에서 국도를 타고 오던 중에 내린 눈발로 차가 180도로 돌은 아찔한 기억 때문에 그런 건 아니다.

조사장의 은근한 요구에 의해 동업에 호의적인 반응을 하였으나 개운치 못한 뒷 맛이 캥기는 탓에 잠을 설친 것이다.

긴박한 자금 문제에 치우치다 보면 본 의도와는 다소 동 떨어진 상황으로 내 달릴 수도 있음을 떨쳐 버릴 수 없다.

그가 말하는 날짜도 채무도 그리고 향 후 소요 자금에 대한 어느 것도 확신하기에는 아무래도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자료를 더 찾아야 겠다.

 

 

월 산악회라는 데서 가리왕산을 간다고 하길래 모처럼 따라 나서기로 했다.

보온병 2개에 끓는 물을 채우고 마실 물로는 우롱차를 600 미리리터 별도 담았다.

겨울이라 갈증은 덜 할지라도 산행 강도에 따라 여분의 물이 필요 할 수도 있을게다.

 

610분에 집을 나선다.

이른 시간에도 전철 안엔 일 나가는 노무자 행색의 여러 사람들이 자리에서 졸고 있다.

근데 난 무슨 팔잔가.

마음이 무겁다.

 

사당역 1번 출구엔 여지없이 당일 출발의 여러 산행 버스가 줄지어 있다.

월 산악회에선 2대가 가는 모양이다.

창가 좌석에 자리하자마자 자켓의 후드를 푹 눌러쓰고 좁은 좌석이나마 최대한의 공간을 확보하여 몸을 뉘이고 문막(소사)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때 까지 설잠이 들었다.

 

3시간을 영동고속도로를 달린 후에야 버스는 진부IC를 벗어나 정선으로 향하는 국도로 접어든다.

몇해전 42번 국도를 통해 정선,삼척..등지로 여름 여행을 떠났을 때 이 길을 역으로 해서 진고개를 넘어 주문진으로 간 적 있는데 정선의 숙암천을 흐르는 시원한 물줄기가 전해주는 계곡 풍경이 더할나위 없이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로 기억한다.

 

차량 통행이 뜸 한 탓일 듯 눈이 내린 산길의 빙판이 위태로워 보이나 버스는 별 무리없이 속도를 붙이면서 아리랑 길을 잘도 간다.

 

어제 밤 안성의 어느 고갯길의 내리막에서 속도를 줄이고자 살짝 밟은 브레이크의 저항을 비웃기나 하듯 차가 옆으로 슬쩍 미끌어 질 때 엉겁결에 더 세게 브레이크를 밟은 것이 화근이 되어 전혀 통제가 되질 않고 가드레일을 받기 직전에 거꾸러 멈추어서던 걸 생각하니 아찔하기만 한데

 

반쯤 줄이면 좋으련만

차량소통이 뜸 한 것이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30 여분을 가서야 버스는 막동골을 지나 가리왕산의 등산 입구인 장구목이골에 도착한다.

7,80 여명의 승객이 한꺼번에 부산하다.

저마다 스패츠며 아이젠을 신고는 등산로로 바로 접어든다.

 

반바지 차림으로 등산을 준비하는 어느 40대의 남자 등산객의 모습에 저마다 한마디씩 건넨다.

대단하다..”

허나 난 그리 좋아 보이질 않는다.

얼마나 신체 단련이 더 된다고 저럴까.

영하 십몇도는 더 될 것 같은데 반바지도 아니고 바지 끝단이 허벅지까지 쑥 올라간 핫팬티를 입은 40대 후반의 아저씨

아무리 개인의 취향 이랄지라도 보기 흉한 것은 어쩔 수 없다.

내가 입는 박스형 팬티 길이보다 길지는 않을 것 같다.

 

월 산악회 말고는 다른 산악회에서 온 등산객은 없다.

어제 내린 눈으로 등산 길은 나뭇가지에 메어 달린 리본으로 찾아 길을 새로 내어야 했고 수십명이 초입에서부터 선두가 낸 눈길로만 줄지어 오르다 보니 산행이 더디다.

 

작년 가을 오색에서의 야간 산행의 악몽이 생각난다.

수백 수천명이 불빛만 따라 한 길로만 가다 보니 산행이랄 수 없는 엄청난 정체의 연속이고 바로 앞 사람이 내 품던 가스로 말미암아 산행 기분을 망치던 그런 기억이 떠 오르는 순간, 길을 잠시 벗어나 울퉁불퉁한 돌길위로 앞 사람을 추월하여 선두에 서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20 여분을 눈길로 오르자 앞서 가던 몇몇은 몸에서 피어나는 열기를 식히려는 듯 덧 옷을 벗는다.

 

눈 길이 만만치 않다.

가리왕산은 국립이나 도립 공원이 아닌 탓에 산행객이 그렇게 붐비지는 않으나 등산로를 덮은 눈을 헤치고 오름짓을 해 대는 것은 힘이 배나 더 한다.

 

그렇게 1시간 가량 올라가니 임도가 나타난다.

얼기 직전의 녹차 물로 목을 축이고 비스켓으로 힘을 보탠다.

 

길은 더 빠르게 경사를 주고 디디는 걸음은 무릎까지 눈에 파 묻힌다.

어쩌다 디딤이 잘못되면 아이젠을 신은 발걸음도 별 수 없이 눈 속의 근거없는 허공을 헤메다가 미끌어지고 그럴 때 마다 미끌어 지지 않으려고 발걸음엔 힘이 순간적으로 더해져 무릎 위의 안쪽 근육에 알이 잡히기 시작한다.

 

앞 사람이 내어 놓은 발자국을 잠시라도 놓칠세라 고개는 자연적으로 숙여졌고 어쩌다가 둘러 본 주변나무엔 눈 꽃이 잔뜩 피었다.

멀지 않은 좌우 능선으론 제법 숲이 우거졌으나 겨울산의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산의 맨살이 드러나보인다.

 

새로 난 눈길을 벗어나 볼 양으로 가끔 짧은 길을 만들어 보지만 그럴때면 어김없이 무릎이 푹 잠긴다.

지난 번 청태산에서 이른 아침의 눈 길 산행시 보다는 한 낮 산행인 탓에 추위는 덜하기는 하나 겨울산의 영하 날씨는 역시 매섭다.

계곡을 오르는 도중 간간이 나타나는 주목나무의 군상은 그 자체 만 해도 아름다우나 하얀 눈을 뿌려놓은 푸른 가지의 배색이 제대로 어우러져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이게 주목나무에 언제나 따라 다니던 관용구이다.

속이 다 비었어도 겉 껍질만으로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늠름한 자태는 주변의 어느 나무들 보다 겉모습이며 긴 세월 동안 온갖 풍상을 겪었으면서도 휘 둘리지 않은 내면의 세계를 한껏 보여준다.

 

옛날 군 생활시 대암산 깊은 산 속의 주목나무를 찾으러 다니던 기억이 아련하다.

조각을 하기에는 최고의 재질로 말년 고참들은 저마다 자그마한 주목나무 동가리를 손에 넣고는 나름대로 깍아 다듬던 일들하며 언젠가 위 선에 상납하려는 부대장의 명에 따라 수십명이 동원되어 주목나무의 뿌리를 캐어 산골짜기에서 끌어 내려오던 일하며

 

임도로 부터 한시간 가량 오름짓을 해댄 후에야 비로서 중봉과 상봉 사이의 안부에 올라섰다.

우측의 상봉으로 방향을 잡았다.

잠시 후 올라선 정상엔 여느 산들과 마찬가지로 무인 기지 안테나가 잠시 눈에 거슬린다.

 

정상엔 어디서 불어 오는지도 모를 돌풍이 사정없이 몰아치고 도착하자마자 자켓을 꺼내 입었으나 방한 장갑 낀 손으로 좀체 자크를 채울 수가 없다.

사방이 확 트여 어느 쪽으로나 깊은 산 능선이 중첩되어 모습을 드러내고 이 흔하지 않는 광경을 담고자 삼각대를 급하게 세우고 사진을 찍을려고 했으나 강풍에 넘어지는 삼각대를 간신히 붙잡았다.

돌무덤을 배경하여 삼각대의 발을 훨씬 더 넓게 하여 겨우 한 컷 담았으나 더 이상의 모습은 내어 주기 싫어하는 듯하여 촬영을 포기했다.

정상엔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을 만큼 바람이 세차다.

 

가리왕산은 갈왕이라는 어느 옛 왕의 호칭에 따라 갈왕산(鞨王山)이라고 한다고 비명이 새겨져있다.

그런데 가리왕산(加里旺山)이라고 표현되는 자가  임금이 아닌 날자를 넣어 왕성할이다.(옥편을 뒤졌다)

이걸 두고 어느 등산객이 일제시대에 이렇게 바꿨다고 열을 낸다.

서울의 인왕산도 날자를 넣어 仁旺山 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이게 사실이라면 당연히 바꿔야 하지 않겠나.

일제로부터 독립을 한 지가 반세기가 훨씬 더 지났는데도 아직도 이런 잔재가 버젖이 남아 있다니!

이게 관계 기관의 무지인지 무관심인지 아니면 알고도 기존 관행을 바꾸기가 어려워 그냥 내버려두는 것인지 그 어느 쪽도 이해가 되질 않는다.

어째 이런 것 뿐이겠는가.

도로공사에서 펴내는 도로지도상의 몇몇 표기 오류도 쉽게 눈에 띄이고 어느 지도 할 것 없이 이런 오류는 많다.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고치지 않는 그 심보가 생각할 수록 괘씸하기 짝이 없다.

 

중왕산 방향으로 우향하여 내려서는 길에 찍힌 발자국의 깊이가 허리춤에 미친다.

밑바닥이 고르지 않은 탓인지 발걸음마다 뒤뚱거리다가 넘어지기를 수 번 했다.

 

체력이 많이 소모 된 듯하다.

심설임에도 불구하고 산행 계획의 난이도가 높다.

통상 북쪽의 장구목이골에서 올라 상봉을 거쳐 남의 휴양림 코스가 일반적인데 상봉에서 서편의 마항치로 내려서 다시 중왕봉으로 다시 오름질을 하는 코스로 계획 되었다.

 

힘을 비축코저 점심을 할 만한 곳을 겨우 고목아래 잔설이 뜸한 곳에서 컵라면에 보온병의 물로 채웠다.

라면이 불기를 기다릴 동안 둥글레 차로 온기를 들이킨다.

한결 낫다.

방한 장갑 낀 손으로도 손가락이 얼어 면발을 젓가락질은 커녕 둘둘 말리는 대로 말아 먹고는 식은 밥 한덩이를 라면국물에 다시 말았다.

온 세상이 하얗게 덮힌 고산의 고목 아래서 추위에 떨어가며 허겁지겁 허기를 채우나 따뜻한 아랫목에서 차린 그 어떤 진수성찬도 지금은 부럽지 않다.

든든해진 속을 인스턴트 커피 한잔으로 한 번 더 다지고 쵸코렛이며 간식꺼리를 장갑에 집히는 대로 잡아 호주머니 이곳 저곳에다 넣었다.

추위는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허기지지 않도록 체력을 그때그때 보충해야 한다.

 

내려오는 길은 다소 수월타.

어느 반반한 내림길에선 미리 준비한 비닐 가방을 깔고 안고는 눈썰매를 탔다.

짧은 거리지만 쑥 미끌어지는 재미가 솔솔하다.

그만큼 발품도 덜이는 덤도 있지만 엉덩이로 가끔 전해오는 울퉁불퉁한 돌의 아픔이 전해오기는 하나 그렇다고 이 재미를 놓칠 순 없다.

 

한 시간 가량 그렇게 내려서자 임도에 내려선다.

마항치다.

몇몇은 옹기종기 바람이 없는 곳에 모여 그때서야 점심을 한다.

임도를 가로 지르는 저쪽의 산으로 중왕산이 놓여 있다.

다시 한번 숨을 고르고 오름질을 시작한다.

체력은 더 떨어지고 가끔 미끌어 지면서 이젠 양 허벅지로 근육통을 넘어선 굵은 알이 박히는 통증이 잦다.

가리왕산을 오를 때 보다 힘과 산행 속도가 반도 채 되질 않는 듯 한다.

수동인 니콘 카메라며 삼각대..그리고 비상사태를 대비한 헤드랜턴 및 응급용품등의 무게로 남들 보다 배낭의 무게가 배는 더 할 것 같다.

가뿐 숨을 가다듬느라 선채로 잠시 쉬기를 두어번 한 후에야 비로서 다소 중왕봉에 올랐다.

아마 정상은 헬기장인 듯 평평하다.

가리왕산을 배경하여 사진 한 컷을 박았다.

바람은 훨씬 덜하다.

 

내리막 길은 허리에 잠길 듯한 눈을 얼마 헤치고 나간 후 저 멀리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급경사 길에서 무리하게 눈 썰매를 타다가 두어 바퀴 거꾸로 구르기도 한다.

서쪽 사면의 하산길엔 눈이 훨씬 덜 쌓였다.

산행을 차라리 중왕산에서 올라 가리왕산으로 하산 하였더라면 힘이 덜 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심설이 쌓인 곳은 오르기는 체력이 배나 더하겠으나 내리는 길은 그냥 굴러가도 될 만큼 눈이 푹신한 쿠션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채 얼지 않은 천당골 어느 계곡을 흐르는 물로 마른 목을 달랜다.

작은 바람에도 나무둥치의 둔한 마찰음이 생기는 하산길 옆으로 연리지(連理枝)가 있다.

뿌리는 달라도 긴 세월 동안 바람에 흔들리다가 나무 둥치끼리 서로 부딪히면서 껍질을 벗어 던지고 서로의 살을 내어주며 섭생하는 나무다.

중국의 당 현종과 양귀비와의 사랑을 연리지라 하였다.

 

눈 덮힌 산골 도로에 내려서니 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김치와 돼지고기로 펄펄 끓인 술국이 준비되었다.

급하게 식은 땀으로 한기가 느껴진다.

옆자리한 등산객과 소주와 동동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몸을 데우고 허기를 달래었다.

정상에서 몸을 가누기 힘들 만큼의 돌풍과 힘든 걸음을 잠시 멈출라 치면 사정없이 파고 드는 추위로 인한 힘든 산행 탓에 좋은 풍광을 필름에 담지 못한 것이 몹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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