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불...緣을 찾아서

강기한 2007. 8. 10. 10:48

  영남 알프스로의 산행         (2003/12/2-,4)

 

 

12/2.

길술이는 트레일러 운전한다.

 

칙칙하게 낡은 햇살이 보도위로 짙게 깔리는 십이월에 막 들어선 어느 날 오후, 그를 만나기 위해 남동공단의 낯선 수출 업체를 찾았다.

 

시간도 맞추고 약간의 여유도 즐길 겸해서 국철인 간석 역에서 부터 걷기 시작하여 시청 인근에서야 택시를 탔다.

도심에서 쉬 보기 드문 행색인 배낭을 메고 니콘 에프엠투 카메라며 삼각대가 눈에 띄이는지 택시 기사는 아마 취재 기자쯤 여겼나 보다.

 

공단 입구까지 잘 달려온 택시는 잘 정돈된 공단 지리를 몰라 왔던 길을 이리 저리 헤메이는 걸 보다 못해 목적지 인근에 차를 세웠다. 

그러고도 미터기 요금을 꼬박 다 받아 챙기는 걸 보니 속으로 참 무딘 양반이다했다.  

 

초겨울 공단의 노을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 길 옆 가로수는 거의 옷을 다 벗고 바쁜 걸음을 옮기는 작업복 차림의 근로자만 간간이 스쳐 지나칠 뿐 인적은 휑하며 도로엔 차들의 행렬은 가늘게 이어진다.  

 

나 역시 블록이니 롯트니 하는 공단 구역에 대한 지식이 없어 46 블록을 찾는데 47 블록이 끝나는 지점에서 엉뚱한 53 블록이 나타나는 등 한참을 돌았다.  

인도 위 포장마차에서 뜨뜻한 오뎅 국물로 속을 달래고 있는 회색 잠바 차림의 근로자로부터 발길을 제대로 찾았다.  

그러나 이건 그 후에 이어 진 영남 알프스 산행 시의 시행 착오를 미리 알려 주는 작은 서막에 불과 하였음을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고 나서야 알았음은 그 후의 일이다.  

 

 

30년 지기인 길술이는 날 만난 햇수 만큼이나 자동차 회사에 다니다가 몇 해 전부터 불어 닥친 그렇고 그런 사회 분위기에 따라 2년 전에 퇴직을 하고 경부고속도로를 통해 부산항으로 수출자재의 운반을 한 지도 이젠 1년이 다 되어간다.  

절대 쉽지 않은 생소한 분야에 새로운 업을 열었다.  

 

1년 만에 본 그는 많이 변해 있었다. 

스포츠형으로 짧게 밀어 올린 머리는 단정함을 주기 보다는 터프한 인상을 풍겼으며 국방색의 주머니가 주렁주렁 달린 쪼끼하며 건빵 바지와 슬리퍼를 신은 그에 대한 느낌은 흔히 보아오던 화물차 기사의 그런 거칠음이었다. 

과거에도 깔끔과 단정이라는 표현과는 그리 친숙치 않았으나 그렇다고 관리직에서 지금 모습으로의 변신은 의외였다.  

 

기차나 고속버스를 이용하지 않고 굳이 그를 만나 트레일러의 조수석을 차지하여 하향 길을 택 한 것은 그간 겪었을 그의 애환과 더불어 생각하고 있는 업에 대한 어드바이스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콘테이너의 실링(sealing)를 마치고 그리 좁지 않은 공단 길을 빠져 나오는데 길 양편으로 주차된 승용

차가 다칠까 봐 핸들을 감았다가 1,2 미터 전진하고 다시 풀었다 그 반 만큼 후진하기를 수 번.  

옆에서 보는 내가 더 안타깝다. 

 

저런 커브 길에 주차를 왜 하는 거야.’  

 

제품 상차가 늦었던 탓에 고속도로를 진입할 때 쯤 해서는 이미 해가 떨어진지 두어 시간은 더 되었다.    

 

그 간 전화만 몇 번하다가 장시간 함께 내려 가면서 하는 얘기는 막힘이 없다. 

애들 키우는 일이며새로운 일을 준비하는 데 관한 어드바이스그리고 얼마 전 일어난 철호의 안타까운 사건 염려스러운 친구들의 작은 관심을 간섭이라 여기 듯 아예 연락 마저 선별하고 잠적 아닌 잠적을 하는 그의 어린 처사에 분을 풀 길이 없어 어느덧 강한 성토가 나온다.

그럴려면 그 간 각 개로 접촉하여 저질러 놓은 작금의 폐해에 대해 왜 한마디의 해명조차 없는지.

가장 우려되는 상황을 벌여 놓고 모두의 양보만을 강요하는 듯한 그의 태도에 대해 이해를 찾고 싶진 않다.

적어도 가치관이 흔들려서는 안되겠기에….     

 

40피트 짜리 콘테이너를 실은 트레일러는 어느 듯 덕유산의 육십령 터널을 가로질러 가고 별 무리 없이 지리산 자락의 산청을 통과한다.  

어둠에 둘러싸여 비록 지천을 구별키 어려우나 령의 좌우에 늘어선 장엄한 산의 자태는 어김없이 가슴으로 다가온다.

 

언젠가 때 되면 두 발로 우뚝 서서 저 능선을 넘어 앞으로 앞으로 가야지.

그래서 갈수 있는 체력이 되는 한 끊임없이 이 길을 이어 가리라.

 

야심한 밤을 가르는 육중한 콘테이너는 이 차 말고 여러 대가 고속도로를 누빈다.   

심야 시간 일반 차량의 운행이 뜸한 틈을 따라  대부분의 트레일러가 운행되며 또 그 시간 대에 도로비도 싸단다.  

매일 심야의 고속도로가 생활 기반이라 생각하니 예사 일이 아닐 것 같다. 

 

간간이 운송업체와 동료 간들의 호출에 응하기도 하면서 시와이(container yard)의 위치와 입고 시간을 체크한다.   

 

김해의 어느 톨게이트를 통과한 차는 외진 도로의 한 켠에 파킹을 한다.  

미리 연락 받고 나온 길술이 안사람의 차를 탔다.   

주어진 삶에 충실히 수행해 나가는 듯 이미 새벽 1시 가까이 되었음에도 노련하게 친구와 나를 대한다.    사는 게 별게 있을려구…’   

 

오는 도중 폰으로 연락받고 찾아간 2층 카페 이전에도 영조와 순복이 둘은 이미 상당한 전주가 있었는 가 보다.  

이 넘 덜  사정 안 봐 준다. 

앉자마자 폭탄주를 2잔 스트레이트로 날렸다.   

 

오랜만의 만남에 대한 반가움과 철호를 향한 어쩌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주 소재다.

날 밝으면 항소심에 대한 선고공판이 있단다.

 

세상 살면서 가장 안타까운 일 중에 하나가 닥친 일에 대해 아무런 대책이 없을 때 이다. 

지금이 그렇다. 

허나 더 속이 뒤 집어 지는 건 주어진 상황에 따라 최상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대비는 가능 한데 그럴 기회마저 갖지 못하게 하는 현실이 서럽다.  

어차피 어떤 일이든 간에 최상의 대비 보다는 항상 차선책으로 모든 상황을 맞이 함이 아니던가.   

어릴 때 친구 사이에 일어나는 자존심 아닌 고집은 그러는 것도 한편 당연하지만 사십 중반을 훌쩍 넘긴 녀석의 언행을 이해하기에는 세상이 그리 녹녹치 않을 게다.

저 스스로 연을 끊는다면 그 결단력 이나마 높이 쳐줄 수 있으나 그것도 아니고 필요에 의해 선을 넣었다가 필요에 의해 선을 끊고 하는 그런 녀석을 더 이상 안고 있을 여유는 없다.   

그렇게 분을 풀다 보니 애꿎은 술병만 자꾸 들락거린다.  

 

아까 길술이 와이프가 주점 앞에 내려 주면서 차창 밖으로 내게 협박 한 게 문득 생각난다. 

 

있지예요새에몸도 안 조코쌔배게 일찍 나가야 하니깐기한씨가 아라서 하이소오…”  

 

알아서 하라고청도 내륙 지방의 억센 액센트를 팍팍 넣는 폼이

아이고 무서버라.

난 알아서 몬 한다.

 

고마하고 이제 지베 가자…”  

 

테이블 위엔 사각 진 빈 병이 3개 였고 쬐그만 갈색 비어 병은 얼마나 되는지 잘 모르겠다.

재떨이 갈아치우는 수 만큼 2번 정도 빈병을 치웠기 때문이다.

 

모처럼 진득하게 초를 친 몸을 끌고 길술이 집에서 하루를 접었다.   

 

 

 

12/3.

갈증이 났다.  

하이고  이게  몇시냐.  

이미 길술이는 트레일러 짐 끌고 나가고 친구 와이프는 애들 등교 준비 하느라고 부산하다. 

나갈 때  깨우질 않고….  냉수를 2컵째 벌컥 들이키고 나서야 허둥지둥 세면을 했다.   

마치  오랫 동안 집 나가서 이제 막 돌아 온 큰 놈 같다.  

어째튼 해장국을 곁들인 밥 한 그릇 하고 배낭과 카메라를 둘러메고 친구네 집을 나왔다.   

 

배낭을 꾸리고 산행을 준비할 때 마다 마음 한 켠에서 슬그머니 이는 작은 떨림은 어릴 때 수학여행을 앞둔 전날 밤의 활화산 같은 흥분에 가까운 요란함엔 미치지 못하더라도 나이 들어서 잔잔한 감흥을 불러 일으키는 그런 애잔한 맛이 있다. 

어쩌면 이번 영남알프스 산행을 계획한 것이 부산에서의 이런저런 일보다도 우선적으로 두었음도 틀리지 않으리라.   

작은 흥분을 가슴 한 켠에 살며시 지펴 놓고 양산 행 버스에 올랐다.   

 

30 년 이상을 부산에서 살아 왔는데도 불구하고 그 땐 1000 미터 이상 고봉이 8봉이나 있는 영남 알프

스의 존재를 알려고 하지 않았다. 

어쩌다가 회사에서 여기 신불산으로 단합대회 겸 산행을 올 때만 해도 그저 연례 행사에 지나질 않았다.  

 

양산 터미날 주변의 변화는 전혀 옛 기억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인근에 종합 운동장이 들어서고 주변의 도로도 시원스레 뚫려있다.  

 

통도사행으로 갈아탄 시골 버스는 옛 길로 접어들고 차창 왼편의 높은 산들의 웅장한 위엄이 볼 만하다. 

바로 저 산이다.  

속으로 전의를 불태운다.   

 

그렇게 제법 시골버스는 포장도로 위를 순조롭게 굴러가며 그리 바쁠 것 없이 쉬엄 쉬엄 간다.   

 

.. 이게 뭐냐….

어디에서 흘러 나왔는지 긴 물 줄기가 버스 바닥을 흐르다가 배낭 밑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아이고.. 이런 낭패가 

중간의 밭 길 옆에서 버스를 탄 할머니의 큰 3단 가방에서 흘러 나온 성 싶다. 

손으로 찍어 냄새를 맡아본다. 

 

할매요  이게 뭔교    기사는 기사대로 나는 나대로. 

  이거 개에안타.. 깬닢 씨츤건데 무를 안짜서 흘러나온기라.” 

 

그나마 다행이다.

()이라 했으면 우예 할뻔 했노.    

 

김해에서 양산 올 때 보다도 양산에서 신평까지가 시간이 더 많이 걸리는 것 같다.     

참 오랜만에도 왔다.  

통도사 입구 오른편으론 큰 놀이기구 시설이 떡 하니 버티고 어느 사찰할 것 없이 크고 작은 음식점이 즐비하다. 

큰 사찰은 수행 도량과 더불어 위락 관광지로서의 역할이 어쩌면 더 큰 비중을 차지 할련지도 모른다.

 

입장료 이천원.

 

난 아직도 사찰의 입장료 징수엔 익숙치 않다.

문화재 관람료라는 명목의 거의 무차별적인 강제 징수는 수행 도량과 돈의 상관 관계를 연결하기에는 어느 측면에서 어리석을 정도로 순진한 마음은 그걸 쉽게 인정하려 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 문화유산을 돈을 내고 봐야 하는 것도 그렇지만 몰이꾼의 몰이 몰듯이 목 좋은 곳에 자리잡고 문화재를 관람하던 하지 않던 상관없이 강제 징수하는 건 뭔 배짱인가. 

 

이왕지사 말 나온 김에, 전국에 걸쳐 있는 국립 및 도립 등의 풍광 좋은 일부 유명산에서의 입산료 징수에 대해서도 여전히 거북하다.

고래로부터 이 산야의 주인이었던 조수들을 사려 깊지 못했던 우리 인간들이 몰아 내었듯이 세파에 찌든 인생들의 그 많은 사연들을 안아줄 품 넉넉한 산에서 조차 재물을 탐한 힘 있는 자들에게 서서히 밀려 가련한 우리 인생들이 잠시나마 마음 놓고 설 자리마저 없어 질 수 있으리라 여기는 것은 비단 나만의 턱없는 비약인가.

 

잠시 틀어진 마음이 되돌아 오기까지는 영축산문(靈鷲山門)통과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였다. 

 

잘 닦인 도로 양편으로 길게 늘어선 몇 아름이나 될 듯한 노송의 늠름한 자태는 세월을 수 십년은 뒤로 돌린 듯하여 아련한 기억에 잠길 수 있게 해서 흐뭇했다. 

불과 얼마 전 만 해도 그 흔하던 소나무 숲은 점차 사라져 가고 왠 만큼 눈에 띄이는 건 갖가지 종류의 참나무 등의 잎사귀 넓은 온갖 잡목들로 숲이 변해 가고 있음을 쉽게 느끼게 한다.

붉은 빛이 가물거리는 나무 껍질을 굵은 세월이 쩍쩍 갈라지게 한 것이 마치 굴곡 많은 인생의 애환을 새겨 넣은 듯한 소나무가 우리 정서에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말끔하게 깔린 아스팔트 도로를 사이에 두고 시냇물이 좌로 흘렀다가 우로 흘렀다가 한다.

아니 아스팔트 도로가 옛부터 흘러온 시냇물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그렇게 갈라 놓았다는 표현이 맞겠다.

 

통도사 본 가람 외 산의 여기 저기에 흩어진 여러 암자며 말사 등의 규모로 볼 때 대단히 웅장한 사찰이다. 

산을 하나 완전히 넘었는데도 아직 갈림길엔 암자의 위치를 알리는 표식이 즐비하다.  

등줄기엔 땀이 송글 송글 맺히고 여기 저기 흩어진 암자로 향하는 고급 승용차와 4륜 차량 2대만 오갈 뿐 제법 깊은 산속의 넓은 아스팔트 도로를 다니는 마을 사람은 커녕 스님 조차도 없다. 

백운암으로 향하는 좌측에 놓인 작은 다리를 건넌다. 

 

11시 반. 

오전 10시부터 공판 한다고 했는데판결이 어떻게 났을까.    

법원에 다니는 처남에게 전화를 넣었다.    

공판 끝나는 대로 알아 봐 연락한단다.    

 

길은 산으로 접어 들면서 좁아지고 앞에 선행하는 아줌마 일행을 가볍게 지나쳤다.  

 

쪼끼와 재킷은 이미 입구 들머리서 부터 배낭에 걸었고 가벼운 짚티만을 입고 오르는데 이내 등뒤로 땀이 흥건해 지고 손등으로 연신 이마의 땀을 훔쳤다.    

 

한치의 여유도 없이 산은 급한 경사를 내렸고 너덜 지대 및 돌 계단을 딛고 힘차게 올라가는 이 느낌은 예전의 1년 내 가도록 신발에 흙 한번 안 묻히다가 어쩌다가 행사에 참가하던 그런 산행시의 숨이 끊어 질 듯 허덕 대던 기억과는 다르다.  

이젠 즐기고 있다.  

제 아무리 높다 해도 쉬지 않고 올라 설 그런 기분이다.      

그래서 정상에서 아무도 억 누를 수 없는 나만의 기쁨을 즐기고 싶다.    

 

쉴 새 없이 치 달려온 저 앞에서 스님 일행이 힘겹게 암자로 향해 오른다.  

 

아이구우리 뒤에 누가 오네.” 

 

그렇게 쉽게 말 문을 띄운 스님은 숨이 헐떡이면서 나의 마음을 열어 제낀다.  

 

여기 백운암에 계십니꺼

아이다. 저 앞..에 보..…....  저으기성 산 내원에 있다 아이가. ……. 2..0…….…. 다시 …...…. ….이리 힘드노….”

 

비구니스님 2분에 보살 한 분이 백운암에 볼일이 있는 가 보다.  

세수 일흔 가까이 되신 비구니스님은 백운암의 내력을 얘기 하다가 숨을 몰아 쉬면서 쉬었다가 이어간다.  

 

저으기옌날에…. 사명대사가출가해…. 가지여기…. 백운암에…… 있다는야기를….고 저……거 누부가 차는데……” “여기가남해보리암하고아이고힘들어서하게따……       처사님  거 안일거 바쓰믄 한번 일거보소…”      

 

스님 지팡이 드릴까예 

그 래..” 

 

동행이었던 보살께 부탁하여 배낭 뒤에 걸어 둔 등산 스틱을 풀어 건냈다. 

바짝 바짝 타오른 갈증을 이온수로 한 모금씩 풀고 비구니스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여행의 새로움을 더 했다. 

 

백운암 입구엔 시원스런 산 물이 피브시 파이프로 통해 계곡으로 떨어지고 그 물을 피이티 통에 채웠다. 

 

그 때 영조에게서 핸드폰이 울린다. 

선고연기를 호소 해서 마지막 기회를 주더란다. 

다행인지 아닌지 잘 판단이 서질 않는다. 

무엇보다도 당사자인 자신이 뭔 가 보여 줘야 하는데 2주 남짓 기일 연기 받은 그 동안에 그 어떤 변화

를 기대 할 수 있을련지.

.. 답답한 놈.  

 

별 크지 않은 암자엔 불사 증축 공사를 하는 인부들의 움직임이 쉬엄쉬엄 한가롭다.  

 

법당에 간단히 올라 부처님께 3배 올리고 반야심경을 암송�다.   

의미를 따지니 보다 그냥 외었으니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처사님  점슴 가치 하입시더 

 

공양이라 하지 않고 점심이라 칭하는 편이 차라리 편했다. 

아니 만만했다.   

 

열어 제낀 미닫이 창호 방문 앞이 확 트여 저기 발 아래로는 통도사의 대 가람이 놓여있고 저 멀리 눈 높이의 천성산의 가물한 능선이 아스라이 펼쳐 이어진다.   

 

도룡농이 원고가 된 천성산 터널공사 중지의 소는

그리고 40 여일을 단식 투쟁 하시던 그 스님은 어찌 되었을 꼬.

 

그 생각이 미치나 풀어 제낀 하늘 저편의 산 능선은 그저 그렇게 서 있을 뿐이다.

 

공양주 보살은  밥을 고봉으로 담고 와서는 등산하는데 기운이 빠지니 많이 먹으라고 하며 비구니 스님은 김치를 찢어 몇 번이나 밥 술 위로 올려준다.   

 

옌날에 안있나…” 하면서 풀어놓는 얘기는, 암자에 몇 번이나 찾아 든 탈영한 복면 강도의 사연을 전해 듣고 어릴 때의 부모 정을 받지 못한 그를 정으로 거두어 자수시킨 일을 재미 있게 해 나간다. 

 

나도 울고 지도 울고 인물은 우째 그리 조튼지... 몇 번 돈도 주고나중에는 면회도 가고지금은 배냇골에 혼자 산다 아이가그 땐 어찌나 무섭떤지 이 건 정을 주야겠다..   시퍼서…” 

 

그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불현 듯 든다. 

 

작별을 고 하고 배낭을 둘러 멘 옷 매무세를 고치고 배낭 끈을 채워주시는 스님을 하마터면 와락하며 안을 뻔 했다. 

 

스님 저 지팡이 스님 써이소오.

내 보담 스님이 더 필요 할 것 같애서요.” 

뭐라카노아이다가지고 가소나 이젠 내려 가는 건 개에안타.” 

아임니더.  지팡이는 내려 갈 때 더 필요 하거등요.”

하이고 개안타카이 처사님이 가지고 가소.”  

 

긴 여정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하는 작은 욕심이 일견 마음을 스치는 순간 더 이상 권하지 못한다.

스님.. 스님…” 그렇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다시 산행을 시작 했다. 

 

 

배속이 든든하다. 

잠시 후에 올라선 능선 3거리에서 지도를 펼쳐들고 우측의 영축산으로 방향을 잡는다.   

산 입구에서 지나쳤던 아줌마 일행이 능선 위에 있다.  

사진 한 컷 부탁했다.   

 

진행 방향의 저쪽 능선으로 신불평원이 잠시 한가한 모습을 보여준다. 

3거리에서 영축산 정상에 이르는 길은 굴곡은 있으나 잔가지들을 헤치며 밋밋하게 걸어야 하는 협로다.

 

영축산 정상엔 바람이 제법 매섭다.  

사과 한 조각으로 약간의 힘을 비축하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여기서부터 간월재까진 나즈막하게 흐르는 억새 구릉이다.

 

 

 

신불평 억새는,

강변에서 키를 훌쩍 덮으며 무성하게 쏟아 하늘을 오르던 그런 위엄을 지닌 억새보다는,

허리 춤에 걸릴 듯 말듯 만만히 흐르면서

쪽빛 하늘을 받치고

그러다가 힘에 겨웠는지

잠시 고개를 내리고는

튀지 않는 수줍음을 지닌 자태로 군락을 이루었고,

이를 흘린 고산 평원은

멀리서부터 밀려온 황토빛 물결위론 비장한 고요가 흐르고

기껏 나무라고는

몸을 마구 비틀어 제껴 한껏 애처로움이 더한 소나무 두어 그루만이

멀찌감치 자리 하는 한 편의 노스탈지어 다.

 

마치 순한 양떼를 지키는 드 넓은 목장의 감시견과 같은 억새 군락과 키 작은 소나무.  

 

고봉의 정상에 시도 때도 없이 불어 닥친 바람이 자신들의 생존 형태를 그렇게 순응하게끔 했을 터. 

 

 

한 낮에도 해가 잘 스며들지 않을 그늘엔

한 촌 짜리 바늘 수 삼을 묶은 듯한 서리가

하늘을 향해 작은 빛을 던지고

녹아 내리지 않을 만큼의 땅기온 탓일 듯

가냘픈 무게조차 이기지 못해

가슴과 허리를 더없이 부드럽게 굽은 모습으로 길옆을 장식한다.

 

그 위로 수도 없이 지나쳤을 발자국으로 사정없이 짓 밟히다 보니 별 수 없이 녹아 내린 서리는 능선 길을 제법 질척거리게 한다.

한 걸음만 옆으로 건너 가면 될 성 싶다만 가만이 제자리를 지키는 그 순박한 억새를 다치게 하고 싶진 않다.

 

억새 능선길은 그렇게 교교하게 이어지고 저 멀리 동해바다를 뒤로 던지며 신불산 정상을 향한다.  

신불산은 이번 산행 길의 고봉 중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다. 

허나 이미 천 고지를 넘어 섰길래 별 어려움은 없다. 

 

간월재로 내려서는 길은 자칫 잘못하여 직진하면 파래소 폭포로 내려서게 된다.  

표지판이 확실한 방향제시가 없어 3거리에서 한참을 독도하여 오른 편에 보이는 임도가 간월재려니 하

고 방향을 잡았다.  

다행이다. 

제대로 온 것 같다.   

 

간월재 마루엔 등산객 상대의 포장마차가 몇 보인다.

재의 좌로는 파래소 폭포로 이어지고 우로는 등억 온천지구다. 

여기서 하산하고 온천욕을 한 연 후에 내일 새벽에 다시 산행을 이을까 잠시 고민이 오간다. 

 

출발 전 집에서 이미 온천 욕에 대한 정보는 가지고 왔으나 입산시간이 늦다 보니 아직 만족할 만한 산행을 하지 못했다. 

간월산으로 방향을 잡았다.

시간적으로 봐서 배내골 정도 쯤 해서 숙박을 할 수 있도록 야간 산행을 준비 해야겠다.  

 

재에서 간월산 정상까진 그리 멀진 않다.  

오후 5시가 넘었다.  

 

오늘 산행하면서 각 봉우리의 정상을 알리는 표석이 있는데 1개가 아니고 보통 2개 이상이 있는 것이 의아 스럽다. 

간월산도 마찬가지다. 

한글로 새긴 것. 

바로 한 걸음 옆에 한자로 새긴 것. 

이것도 지자체에서 세운 것과 각 산악회에서 홍보 목적으로 기존의 표석과는 상관없이 추가로 세운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를 바엔 차라리 3거리에서 헤깔리지 않게 방향표지판이나 좀더 충실히 세워 놓는 편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훨 효과가 좋으련만   

 

하산길 옆으로 튀어나온 잔가지가 좀 있긴 해도 별 무리는 없다.    

20 여분 하산 했는데 길은 느닷없이 임도로 내려선다.  

….이 길이 아닌데비 포장 도로의 임도엔 차량은 다니질 않고두리번 거리다가 건너편 나무 가지 끝에 잔뜻 메어 달린 리본을 보곤 그 쪽으로 올라 갔다.  

그 뿐이었다. 

 

몇 걸음 옮겨 등산로를 찾으려 했으나 보이질 않는다.  

.. 어떡하나날은 곧 어두워 질텐데   해만 길면 어떡하던 길을 뚫을 수도 있으련만지도를 펼쳐 보니 간월산에서 하산길을 잘못 잡은 것 같다.   

 

꼭대기에서 다른 길은 보질 못했는데   지도 상엔 등산로와 임도가 연결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다시 올라가서 배내골로 가기엔 지금부터 2시간 가량 소요 될 만한 거린데….

해 떨어지고 난 후의 산 길은 그야말로 지금보다도 고약할 듯.   

 

별 수 없이 임도를 따라 털레털레 발길을 옮기면서 혹 저기 돌아가는 저쪽에서 등산로를 다시 찾을 수 있을련지 하는 막연한 기대를 걸었으나 등산로는 없었다.     

저 아래 계곡 옆으로 이어지는 하염없는 임도로 하산 할 생각을 하니 맥이 풀린다.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걷는 수 밖에.  

에이꼭대기에서 다른 길이 있는지 한 번쯤 둘러보고 내려 왔어야 했는데

그건 그렇다 치고 방향 표지판은 또 그게 뭐냐

 

승용차 한대가 지나친다.   

대충 보니 애들 포함하여 6,7명은 되는 것 같다.  

 

조심해야 할텐데… ‘

 

저기 밑에 보이는 데 까지 1시간은 더 걸어야 될 성 싶다. 

산행의 맛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그러던 차 등 뒤에서 비 포장길을 구르는 반가운 음이 들린다.  

뽀얀 흙먼지를 휘날리며 4륜차가 내려온다. 

옳다.  

히치 하이킹을 해야지

 

속도를 서서히 줄이는 코란도 패밀리를 확인 한 순간 스틱을 높이 치 들곤 흔들어 댔다.  

 

저어…” 

타이소오…”  

 

배낭을 짊어진 채로 뒷 좌석으로 불편하게 나마 자리를 했다.  

 

어데서 왔습니꺼.” 

서울예...  간월산에서 길을 잘못 들어 갔꼬… “ 

우리는 간월재에 있슴니더.”   

.. 아까 보이던 그 포장마차인가 보지예.”  

근데 집이 부산 가튼데예.” 

예 마씸더.” 

우리도 부산인데 지금은 요미테 있슴니더.” 

나도 부산이 본래 집임니더.  학교도 부산에서 마치고직장도 울산에서 오랫동안 있었슴니더.”

 

그때 까지만 해도 묵묵히 핸들만 잡던 아저씨가 한마디 건넨다.  

 

울산 어데예…” 

울산 ㅇㅇㅇ 입니더.”  

무슨 파틉니꺼 

?  Ooo 입니더.” 

그래예나도 그겔 잘 압니더…”  

 

옛날에 근무 하였던 회사가 대규모 복합 공장이다 보니 타 공장 및 외주 시설업체도 많이 들락거려 직접 연관이 없으면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  유틸리티했슴니꺼… “

아니예.”  

그라믄 메인터넌스 쪽 입니꺼  

아니예.   xxx 제품 했슴니더.”  

?  나도 xxx 했는데…”  

 

그렇게 시작된 얘기는 불이 붙었다. 

지금부터의 아예 말 상대는 완전히 아저씨와 나였었고 숙소에 도착 할 때까지 아줌마는 묵묵히 듣고만 있을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엉청난 진도를 내고 있었으며 자연스레 그가 기거하는 온천의 한 식당에서 술 잔을 마주하며 장시간 얘기 꽃을 피웠다.  

 

회사 소속의 엔지니어인 나와는 달리 그는 수많은 제품을 로칼로 수출하는 중간 딜러 였었고 내가 해외 파견 근무를 마치고 귀사 및 본사 발령 후 그는 로칼 제품 생산 및 비즈니스를 위해 내가 있었던 해외 근무 현지를 답사한 적도 있었다고 하니 나와는 직접 업무는 없었어도  내가 떠난 뒤의 선임 및 후배의 이름 석자는 줄줄 꿰고 있었다.    

 

일반인들이 들어서는 전혀 알 수 없을 전문용어가 나도 모르게 모처럼 튀어 나오고 귀로 주워 담는데도

서로는 조금의 불편도 느끼질 못한다.  

 

백운암에서 언젠가 자신도 3개월쯤 기거를 했다고 하니 이건 또 뭔 일 인가 싶다.  

 

그렇게 계획 하지 못했던 뜻밖의 인연으로 술을 한잔 걸치고 그의 안내를 받아 온천의 호텔에 투숙했다.  

이게 뭘까.  

백운암에서의 비구스님에서 시작된 연은 이렇게 이어지는구나.   

의미있는 하루였다..   

 

  

12/4.

모닝 콜은 6시에 울리고 호텔 내의 대중 온천에 몸을 담궜다.  

 

피부 끝으로 따끔 따끔하게 비벼대는 싫지 않은 뜨거움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짧으나마 어제의 피로를 풀었다.  

노천탕 밖의 어둠은 채 벗겨지지 않으나 서서히 빛을 내려 신불산의 위엄을 한 눈으로 다담을 수 없을 정도로 가까이 위치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아침을 아주머니가 손수 끓인 고등어국(?)을 반찬하여 1공기 이상을 비웠다.

찌게라고 하기에는 국물이 너무 얼컨하고 국이라고 하기에는 밥을 말을 수 없는 아무튼 그 중간치 되는 고등어 물조림정도로 해 두자.   

호텔의 식당과는 잘아는 듯 했다.    

 

산행의 계획을 통도사의 영축산에서 부터 시작하여 표충사로 이르는 사자평의 능선길을 마음 먹었던 터 라 어제 빠뜨린 구간을 계속 잇고자 하니 칼바위 능선을 추천한다.  

나중에 재를 지나칠 때 다시 만날 걸 기약하며 간월골로 다시 올랐다.  

간월골 계곡으로 흐르는 맑은 물을 딛고 잠시 올라서니 높이가 30여 미터쯤 달하는 웅대한 폭포가 왼편으로 나타난다.    

홍류폭포다.    

고산의 산행이 어려운 노약자도 여기까지는 무난하지 않을까 한다.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중간의 바위를 때리면서 그것을 견디다 못한 바위는 부드러운 곡선으로 마무리를 했고 쉴새 없이 쏟아지는 물줄긴 얕게 퍼지다가 그 바위 끝에서 다시 가는 줄기로 흩어져 아래는 제법 깊은 소를 이룬다. 

 

이른 아침의 고요한 산에 혼자 이 풍광을 보고 있자니 벅차다.

셔터를 갇다 드 밀어 대었지만 여러 가지로 조건이 안 나온다.

 

폭포를 오른 편으로 두고 중간쯤 올라보니 소 옆의 작은 동굴 속에서 양초 불빛이 여러 새어 나온다.    어딜가나 저런 곳은 가만이 놔 두질 않는다.  

어째튼 그들의 염원이 이루어 지기를 바란다. 

 

한발한발 올라서며 신불산으로 향하는 이 등산로는 험로다.  

중간쯤 올라서니 큰 암벽이 나타나고 20여미터 저 끝의 나무둥치를 지지 삼아 긴 동앗줄을 내리고 있다.     

릿지다.    

 

장갑을 낀 손으로 번갈아 줄을 낚아 채며 가랭이 사이로 내리고 올라선 암벽 중간에서 등 뒤의 풍경을 조망해 본다.   

가까이는 등억온천 마을이 자리하고 곳곳에 시골 마을의 황량한 늦 가을 전원이 펼쳐지며 그 사이를 경부고속도로가 긴 금을 그어 놓았다.    

날이 좀더 맑으면 동해 바다까지 보일 뻔 한다.  

 

그런 암벽이 3번쯤 나온다.  

멋진 산행이다.  

 

그러다가 가파르게 올라선 1평 남짓한 자리 바로 위로 부턴 바위의 모양이 심상치 않다.

삼각 막대를 옆으로 길게 뉘인 형상의 바위가 저 위로 보이는 신불산 정상까지 이어졌다 끊어 졌다를 반복한다. 

 

.. 이게 칼 바위능선 인가 보다. 

도상에는 신불릿지로 표현된다.  

제대로 방향을 잡았다. 

 

칼날 처럼 날카로운 바위 위의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바란스를 못 맞추면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굴러 떨어질 위험이 늘 있다.  

이게 재밌다.   

 

허리를 앞으로 상당히 굽히고 여차하면 배를 사정없이 칼 바위의 날카로운 날 위로 밀어 붙일 태세다. 

그래서 왼손으로는 바위의 왼편을 지탱하고 오른손으론 오른쪽 칼등을 잡는다는 얄팍한 계산이다. 

말하자면 긴 작두날 위에 바짝 엎드린 자세다.

이게 그래도 옆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 보다는 훨 낫다   

이런 곳은 어김없이 10여 미터 아래쯤 우회로가 있긴 허나 전혀 고려 대상은 아니다. 

 

 

영축산에서 신불산을 지나 간월재로 이어지며 온 세상의 아픔을 다 안을 듯한 억새 평원의 푸근한 모습을 볼 땐 거적만 덮으면 그 곳이 바로 집이며 안방이 될 듯 자식의 허물을 다 덮을려는 한없이 넓은 어머님의 품을 연상케 한다면 여기 칼바위 능선의 매서운 자태는 한치의 어긋남도 허용치 않을 줏대 강한 고풍스런 명가의 회초리를 연상케 한다.  

 

어느 것이 더 낫다고 할 수 없이 정확히 상반된 각각의 감흥을 불러 일으킨다.

모두 신불산의 압권으로 억새 구릉은 눈 맛이고 칼바위 능선은 손 맛이며 발 맛이다.    

 

늦은 오후에 본 신불산과 아침 신불산의 느낌이 다르다. 

아마 어제 급히 발길을 옮기려다가 채 느낄 여유를 갖지 못한 차이도 크리라. 

 

저기 간월재가 눈앞에 다가온다.   

산등성이로 낮게 흐르는 억새 숲을 헤치고 아침에 헤어진 부부와 재회했다.   

 

좀 늦었네예.”

 

부인이 반기며 인사한다. 

 

.  사진 찍는다꼬예…”  

 

뚝배기 사발 가득하게 막걸리를 담고 두부에다가 김치를 쟁반에 담았다.

뭔 김치가 반 포기는 되는 듯하다.  

아니웬 김치를…. 

아마 좋은 연으로 만나 나름대로 대접한다고 푸짐한 양을 차리지 않았나 싶다.  

막걸리 한 사발에 이 정도로 김치를 내어온다면 웬만하면 김치공장을 차려야 수급 가능하지 않을까.  

이미 통 성명을 어제 주고 받았고 이틀에 걸쳐 다시 마주하니 꽤 친분이 쌓였다.  

 

나보다 3년 연배인 그의 표정이 만만하다.   

 

한 쪽 눈이 다소 일그러진 듯 한 우직한 표정의 얼굴을 가진 그는 결코 달변이랄 수 없는 화려하지 않고 느릿한 말을 하는, 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편안케 하는 그런 묘한 재주를 지녔다.

억새의 화신이 있다면 이런 모습쯤 될 것 같다.                                                                                                                                                                                                                                                                                     

 

어느 주제이든 간에 막히지 않고 대화가 이어지고 어차피 산에서 만난 인연임에 따라 조만간 뜻있는 산행을 함께 하자고 주저없이 기약했다.    

 

포장마차 안쪽에 걸린 지인이 한 편 새겨 주었다는 

 

세상사 힘겨워 감당키 어렵거든 / 간월재에 올라 / 골바람에 몸 맡기고 / 영겁을 사는 저 억새들을 보거라 / …… ‘/   로 하며 이어지는 싯귀를 놓치기 싫어 사정없이 필름에 담았다.   

 

신불산에서 간월재로 나즈막하게 흐르면서 제 자리 지키며 남 탓하지 않고 천 년을 겪어왔을 억새의 몸짓을 보노라면 거슬리지 않는 삶의 기준을 보여 주는 것 같다.  

좋은 인연으로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며 간월산으로 올랐다.   

 

햇살은 따사롭게 산등성이로 가볍게 내리고 가뿐 숨을 몰아 쉬며 단 걸음에 오르기에는 취기로 인해 알딸딸 하다.  

 

비스듬히 경사를 준 길 옆 푹신한 억새위로 무너졌다.  

따뜻한 햇살을 가슴에 잔뜩 안고 스르르 잠이 든다. 

편안하다. 

주위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만추의 고산에 찾아들 인파도 없다.

난 그렇게 세상에서 제일 편한 자세로 간월산에 내 삶의 무게를 얹혔다.

거부하지 않고 포용하며 산은 나를 받아들이고 난 온 세상을 품에 안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몽롱한 정신을 귓가에서 지저귀는 산새의 울음이 한 끗 늘어진 마음을 다 잡는다..

여전히 따스한 햇살은 산등성이에 가득하고 하늘은 쪽빛 그대로다.  

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간월산을 오른다. 

여기도 이틀 사이에 2 번 오르는 셈이다.   

 

일러준 대로 간월산 정상에서 직진이 아니라 우측의 등산로를 찾았다.  

배내봉 정상까지는 대체로 하향하는 능선 길이라 수월하다.    

 

배내봉에서 호텔에서 준비한 보온병의 뜨거운 물로 차를 한잔 했다. 

 

둥글레의 구수한 향기가 온몸으로 전해진다.  

잠시 그렇게 쉬고 표지를 보곤 억새밭으로 다시 이어진 길을 따라 갔다. 

 

오두산이라고 한다. 

준비해간 도상엔 명칭이 없다. 

 

얼마 걸리지 않을 거라 예상 했는데 거의 40여분을 가도 배내골이 나오지 않는다.    

이상하네  아까 임도가 보이던 그 길로 연결 될 줄 알았는데….

 

3거리가 나타난다.  

좌측엔 석남사 우측으론 밀봉암.. 

 

…. 여기가 아닌데… 3거리 한 쪽은 글자를 지웠다.  

그럼 여긴가머리를 갸우뚱해 본다. 

 

글자 표시가 없는 그 길로 따랐다. 

가면서도 현 위치가 계속 의문스럽다. 

저 앞에 보이는 봉우리에 서면 다시 연결되겠지.. 그런 불확실성으로 길을 재촉했다.   

 

봉우리쪽으로 거의 접어 들 무렵 조금 전 내려설 때 길 왼편에 바람 빠진 빨간 풍선이 있던데 이젠 오르막의 오른쪽에 비슷한 것이 보인다. 

 

헤 깔린다.   

어라…. 아깐 길 안내 밧줄의 매듭 중간 중간을 피셔 매듭으로 연결 했던데   ..   반대편으로 같은 매듭을 본다.    

그렇다면……   이내 올라선 봉우리는 다름아닌 1시간 반 전에 하산 했던 바로 그 배내봉이었다.  

…… 이럴 수가…… 낭패라는 생각보다는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미로 길을 갔다가 다시 되돌아 온 셈이다.  

3거리에서 표지의 글자가 없는 곳을 이리저리 둘러 보다가 다시 왔던 길을 되 돌아 왔었던 것이었다.    연 이틀 연달아 엉뚱한 길에서 이렇게 헤메다니. 

 

그래도 어제보다는 오늘이 더 심했다.   

산행이 힘겨웠던 탓인가 보다.

알고보니 그때서야 배내봉에서 갈대사이로 어지러히 늘려져 있는 많은 흔적이 보였다.  

직진이 아니라 직좌해야 했었다.  

 

배내골까지 내려서는 길은 등산로로 말하자면 대로였다.

전혀 옆길로 샐 수 없는 그런 길이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달리 설명 할 길이 없다.  

 

얼마 후 내려선 배내골엔 공사가 진행 중이다.  

가게에 물어보니 앞산이 능동산이고 저 능선으로 재약산과 수미봉으로 이어지며 표충사로 내려서게 된단다.  

 

어제와 똑 같은 시간대에 똑 같은 실수를 되풀이 했다.

4시간 계획으로 다시 올라갈까도 싶었다.  

이왕 여기 까지 왔는데….  결론을 못 내리고 어거정 거렸다.

 

아마 산행을 그만하라는 그 어떤 계시가 있었지 않았을까.  

어제 비구니스님과의 만남에서부터 간월재 부부와의 연을 생각해볼 때 그게 그럴 수도 있겠다 라고 여기는 게 옳을 수도 있겠다 싶다.

조그만 변화다. 

 

가끔 산길을 지나치는 차는 남으로는 양산의 원동으로 내리고 북으로는 언양으로 오른다.  

 

그렇게 배내고개에서 하산키로 마음 먹고 있던 차에 익숙한 차 한대가 앞에서 선다.   

 

아니어떻게 된 겁니까.” 

 

눈이 휘 둥그래진 그들 부부의 차를 낙동정맥을 탄다는 산악 구조대원 1명과 함께 올라타고는,

 

홍선생님 내외 분을 한 번 더 보고 가라는 것 같아서 그렇게 됐습니다.”     

 

정표로 손때 묻은 등산 스틱을 건넸다.

어차피 이 스틱은 여기에 있어야 할 물건 이었는가 보다.   

 

  

이틀 동안 산행하면서 배낭 속의 짐은 거의 그대로이다.

끼니 때마다 어떤 인연으로 해결했다.

 

안타까운 緣그리고 새로운 緣.

마음 한 켠이 애린다.

 

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