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기맥, 운두령에서 불발현으로. 111004
우리나라 불교의 최고 성지로 알려진 오대산은 5개의 봉우리로 둘러싸여 있다. 그 중 두로봉 인근 서대 염불암 옆의 샘인 우통수(于筒水)에서 이른 아침에 처음으로 길은 정안수로 끓인 물은 조선제일의 차 맛이 우러나온다고 하였다. 이 물은 천연기념물인 열목어가 서식하는 오대천으로 내려 남으로 흐르다가 정선의 나전리에서 남한강의 상류로 흘러 들고는 계속 서진을 하여 저 멀리 두물머리에서 북한강과 합수하게 되는데, 우통수는 이른바 한강의 발원지인 셈이다.
그 물을 따르는 산줄기가 있다. 오대산 5개의 봉우리 중 가장 북쪽에 있는 두로봉은 백두대간이 지나는 주요 봉으로 진고개를 거쳐온 대간을 북으로 계속 이어 보내고 또 하나의 긴 맥을 한강의 발원지인 우통수에서 기원한 물줄기와 함께 서진하여 양평의 청계산에서 한강으로 잠입한다. 산꾼들은 일찍이 이 맥을 한강기맥이라 일컬었다.
천미터를 쑥 넘어서는 고개마루 운두령은 계방산에서 남으로 내려온 능선을 이어받아 그 맥을 서편으로 흘러보낸다.
이른바 한강기맥의 주요기점이다.
알람이 울리기 전에 깨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부터 늦으면 안되는데…하며 속으로 꽤 애를 쓴 탓이다. 그러니까 비몽사몽으로 날밤을 새었다고 보는게 맞겠다. 까만 4시 10분. 잠자리를 차고 나오자 마자 전기포트로 물을 끓였다. 보온병에 뜨거운 물을 담으며 배낭으로 챙길 때서야 알람이 울린다. 밤새 바쁘기만 했던 마음이 금새 여유로워진다. 배낭으로 스틱을 재차 고정시키며 주섬주섬 현관을 나섰다. 아직 버스가 다니지 않는 휑한 새벽 길을 어슬렁거리다가 택시를 탔다.
대중 교통편이 여의치 못한 너무 이른 탓에 동행하는 산객들은 반이 채 되질 않았다. 나 역시 어쩌나 하며 고민하다가 어차피 개인으로 와도 교통오지인 운두령에 오는건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기에 마침 안내산악회 버스 편을 보고는 이왕지사하는 마음에 동행하게 되었다.
숲을 헤치고.
운두령 마루에 도착한 버스의 문이 열리자 마자 울타리를 뛰쳐나온 토끼마냥 우르르하며 산으로 접어드는 일련의 산객들 중간에 함께 끼였다. 참으로 간만에 보는 별로 즐겁지 않는 모습들이다. 홀로 산을 다닐 때야 체력에 맞게 그리고 산을 즐기면서 여유롭게 때론 바쁘게 가 면 될텐데, 단체산행 특히 안내산악회 산행에서는 이런 여유들이 없다. 나 때문에…라는 배려심도 있겠지만 내가 먼저… 라는 경쟁심리 또한 없진 않기 때문이라 본다.
투구꽃.
유일하게 조망이 열리던 1381 고지의 헬기장에서 패스트락 스틱을 땅에 꽂으며.
별 여유롭지 못한 산걸음은 산길 역시 한몫을 했다. 고산이라 능선에서 저 먼 곳을 향한 아련한 눈 맛을 즐길 수 있으려니 기대했던 건, 언감생심. 산은 능선을 따라 뚜렷한 길을 내어주는 것 말고 좌우로 원시림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으며 도무지 시야가 트이는 곳이라고는 없었다. 그저 묵묵히 땅으로 코박고 걷는 것 외에 딱히 눈 둘 곳도 없었다. 허긴 객 역시 그런 세속적인 목적, 말하자면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기맥을 잇는 숙제를 하는 것 외에 또 하나의 의미는 스틱을 테스트하기에는 이만한 곳도 없다는 것이 본 산행길을 계획했던 주요 이유였다. 대충 때워서는 않된다 라는 자의식이었다.
1331M의 보래봉 정상.
고산으로 갈물이 들기 시작한다.
그래도 산은 평온했다. 운두령이 천미터를 쑥 넘어가는 고지이다 보니 십여개의 고산 준봉을 오르내리기는 했으나 그리 호흡을 가파르게 하는 오름길은 아니었다. 지난 여름 내내 온 산을 시퍼렇게 물들인 땡볕은 물러간지 오래, 이젠 희끗희끗하게 나뭇잎으로 잘 익은 갈 빛이 내려앉은 숲은 한결 차분해 지고 있었다. 가을이었다.
기맥을 잠시 벗어나 홀로 회령봉으로 급히 내 달렸다.
이 만한 조망 조차도 귀했던 원시림의 한강기맥.
가을빛...
사방천지로 조망이 막혔을 뿐 길은 좋았다.
길 놓칠 염려는 없이 뚜렷하기만 했던 산길은 보래봉을 지나 기맥에서 잠시 비켜선 회령봉으로 내리는 삼거리에서 뚜렷한 두 길의 흔적으로 잠시 생각나게 했을 정도. 언제 여기를 또 오려나 하며 기맥길을 잠시 둔 채 홀로 회령봉으로 바쁜걸음 옮겼다. 능선 아래로 떨어지는 양 옆의 숲은 기맥길보다 더 적막한 것으로만 만족해야 했던 건 멀리서는 우뚝 솟아 있던 회령봉 정상은 기대했던 조망을 열어주지 않았다. 사진 한장 남기고 이내 발길 되돌렸다. 시퍼른 초록은 희끗희끗하게 변했을 뿐 아직 단풍이랄 수 없는 산길을 양손으로 부지런히 스틱 찍어가며 바쁘게 산능선을 갈랐다.
운두령에서 입산하여 6시간 반만에 내려선 불발현.
사실상의 산행은 끝이 났다.
허나 자운리로 내리는 기나긴 임도를 따라 가야한다.
불발현의 표식.
홍천군 내면 자운리가 저 아래에.
자운리로 내리는 임도를 따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으로 온통 갈물이 들겠다.
고냉지 무우밭.
여기저기의 무우밭으로 출하가 한창이었다.
버려진 이따만한 무우 하나를 간신이 배낭으로 쑤셔 넣었다.
스틱은 도심 인근의 바위산 보다는 아무래도 긴 능선을 종주하는 산행에는 필수 운행 장비다. 더군다나 우거진 원시림의 긴 능선 종주를 하면서 그 때 그 때마다의 느낌을 체크하기에는 더없이 좋다고 여겼었다. 바쁜 걸음 재촉하며 고산능선을 6시간 반이나 걸은 불발현에 와서야 사방으로 하늘이 열렸으며 다시 지리한 임도를 1시간 반이나 걸어 산을 내렸다. 평온한 산골마을은 고냉지 무우의 출하가 한창이었다.
한강기맥, 뜻하지 않게 긴 시간에 걸쳐 퍼즐 맞추듯 걸음 하였는데 이제 딱 한걸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