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마지막 날, 영남알프스 ! 그 길을 다시 이으면서... 101031

강기한 2010. 11. 5. 16:08

1. 그 길을 다시 이으면서.

 

밀양에서 언양(울산)으로 가려면 험준한 산 한 복판으로 차가 들어간다.   이른바 울산 밀양 청도 경주의 4개 시군에 걸친 영남알프스라 불리우는 가지산 도립공원 내의 고산들이 도로 양편 또는 전후로 중첩되어 늘어서 있어, 고산 허리를 감아도는 도로의 차창 밖으로는 천미터를 오르내리는 산 봉우리가 연이어 나타나고 그 높이 만큼 깊은 계곡들을 품고 있는지라, 이 일대는 거대한 산국을 이루고 있다.   면적으로 보자면 남한 제일인 지리산의 약 절반에 해당하는 250㎢ 에 이른다.    

 

그 고산들의 능선을 오르내리면서 그리고 산정에서 사방으로 굽어보는 조망은 막히는게 없어 장쾌하기 그지없다.    특히 가을 이 맘때 쯤의 신불재와 인근의 간월재 그리고 재약산 부근의 사자평원으로 늦은 오후의 햇살이 투영되어 일렁이는 억새풀은 황홀하기까지 하다.   별 볼품없는 억새가 온 몸을 비비며 울어 제치는 군무는 힘든 산 걸음을 한 산객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아련한 추억의 한 면을 간직하게 해준다.   이쯤되면 산을 즐겨 찾는 이가 아니라도 한번쯤 걸음이 동할 만도 하다.  

 

몇 해전 가지산 도립공원의 많은 부분을 접하고 있는 울주군에서 별도로 울주 7봉으로 상표 등록을 시도하자 인접한 타 시군에서 심한 반발을 하는 등의 촌극이 있었다.   알프스 라는 호칭이 좋다는게 아니라 별로 건전치 못한 사적인 욕심으로 발로되었을 그런 안하무인격으로 밀어 붙이는 이기심이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은게다.     

 

사설이 길었다.    어찌되었건 원상회복이 된 영남알프스를 간다.    운문산으로 하여 가지산을 올라 석남고개를 지나서 천황산 그리고 재약산 수미봉을 내려서 표충사에서 마감하려 계획한다.    예전에 다녀 왔던 영축산과 신불산 간월산의  아련했던 기억과 그리움이 다시 이 길을 잇게 하였다.   

 

이번 산행은 부산으로 일 보러 가는 걸음에 겸사하여 급히 짐을 꾸렸다.     따라서 헤드랜턴과 스틱이 미처 준비되질 못했고, 이는 저녁무렵에사 운문산을 오르면서 비박을 할 때에 꽤나 아쉬웠던 장비들이었다.   그 긴 걸음...  일생에서 가장 길었던 산 중의 10월의 마지막 밤,  아 ~  홀로 그 얼마나 맘을 졸였던가.   

 

 

 *

 

2. 니, 정이 그리웠더냐...

 

 밀양에서 언양가는 버스.

 

 

 

밀양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출발하는 언양향 버스에는 예닐곱명이 탓다.    열살 남짓한 꼬마 둘이 지네들 끼리 떠들다 버스를 오른다.  

 

 

"아저씨, 이 차 송백가능교?"   

 

"안간다. 이노무자슥뜨라."   

 

 "그라고 너거 칭구들 마이델꼬온나, 알긋나."  

 

 

그랬기나 말기나 아이 둘은 까르릇 웃음을 터뜨리며 건성으로 "야" 하며 답하고는 뒷자리로 요란스레 앉는다.   낄낄거리는 아이들의 말도, 억센 사투리를 뱉어 내며 승객인 얘들과 댓꺼리를 하는 덩치 큰 중년의 버스기사도 저들 나름대로의 소통 방식이었다.   참 오랜만에 듣고 보는 대화법이었다.  

 

 

 

 석골사 입구에 내렸다.

잠깐 비가 흩뿌리다가 이내 그쳤다.

 

 

버스는 이내 시골 길로 접어들었고 도로 양옆의 과수원으로는 잘 익은 사과가 주렁주렁 열려 있었으며 여러 대의 승용차가 길 옆으로 정차 중이었다.    얼음골 사과 축제기간이었다.    그리 바쁘지 않게 가는 버스는 도로 곁에서 손을 드는 할머니를 보고는 이내 차를 세운다.   중년의 기사는 이번에도 그냥 있지 않았다.  

 

 

 

 "할매, 요기서 타믄 우짭니꺼. 정류소도 아인데, 담부턴 안세워줄낍니더."  

 

  "뭐라카노, 내가 뻐스탈라꼬 쌔빠지게 달리완는데, 안세우믄 우짜노." 

 

  "정류소서 타야지요." 

 

  "그라믄안된다. 이 뻐스 몬타믄 내보고 언양까정 우째가라꼬." 

 

 

 

만만찮은 상대인 그 들의 대화는 목소리도 하이톤 그대로다.     석골사 입구를 묻는 객에 대한 기사의 대답은 여전히 우렁찼다.   단지 달라진거 라고는 말 끝을 내린 듯 하다가 살짝 감아 올렸다.   그러니까 공손했다.    객은 이방인이었던 것이었다. 

 

 

 

 

 행정명은 밀양시 산내면 원서리.

그러니까 봄부터 초가을까지 굴에서 얼음이 언다는 천황산 아래의 남명리 얼음골이 5Km 남짓이다.

 얼음골은 속속들이 꿀이 잘베인 사과가 유명하다. 

마침 사과축제기간이었다.

 

 

길에서 손만 뻗으면 닿는 사과.

 

 

 석골사 가는 길목 양옆으로 사과 밭에서 먹음직한 사과가 주렁주렁.

입안으로 침이 고였다.

 

 

 

 

 

좌측 건물아래에서 마침 수확한 사과를 바구니에 담던 아낙이 있었다.

 

 

"저으기, 낱개로도 팜니꺼"

 

"...에"

 

 

젊은 아낙은 통통한 손을 쉴새없이 바쁘게 움직이며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짧게 대꾸하였다.

 

 

 "그라믄 며깨만 주이소~"

 

 

그제사 고개를 들며, 객을 쳐다본다.

그러더니 두 손으로 사과 4알을 집으면서,

 

 

"사네가는모양이지예"

 

"예..., 얼마드릴까예"

 

"대씸더, 그냥 가지가이소오~"

.

.

.

 

그 4개의 사과는 이틀동안의 산행에서 아주 요긴했다.

 

 

  

3. 가을 해 저무는 절 집을 기웃거리다.

 

 

산으로 스며든 가을의 저녁빛이 참 곱다고 생각되었다.

 

 

임진년때 밀양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곳이었다. 

 

 

 

잠깐 비가 흩뿌리는 듯하였으나 내려선 석골사 입구인 원서리에서 보는 저 편 산하늘로 무지개가 걸렸다.   오후 5시.  석골사로 접어드는 샛길 양 옆의 과수원에도 수확을 기다리는 사과가 많이도 달려 있었다.   버스를 내린 후 30분 만에 도착한 석골사는 늦은 오후여서 인지 인적은 없었고 간혹 늦은 산을 내리는 산 객들만이 무심히 지나쳤다.   

 

 

 석골사의 돌다리.

사진을 찍은 곳이 차도 다닐 만한 길이 있어

이 석교는 효용성보다 상징적인 의미로 세워졌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운치도 있어 보이질 않은가.

 

 

석골사는 규모가 작은 절로 운문산을 올라가는 주요 기점이다.

 

 

저녁무렵의 절집은 호젓하기 이를데 없다.

 

 

 

 

 

아담한 암자 수준의 절은 주변의 호젓함과 무르익은 가을의 저녁으로 한결 운치가 있었다.   별 눈 갈데 없는 절집이지만 소홀히 대할 수도 없는 그런 분위기로 이리저리 포커싱을 하였다.    해가 떨어지는 산으로 접어드는 마음 한 켠 두려움이 없진 않았으나 '뭐, 어때 별 일 있겠어...' 라는 야릇한 호기심이 좀 더 컸던 것 같다.   안되면 노숙을 하지 하며 미리 침낭을 챙겨 왔었다.    당일 산행에 50리터 배낭을 진다는게 어쩐지 켕기지 않아 뭐라도 꽉 채워서 1박 2일을 계획 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침낭, 작은 코펠과 소형 버너 그리고  다운재킷과 햇반과 라면 2개씩.  1박 2일의 산 짐은 모두 그렇게 꾸려졌다.  

 

 

 

 문을 빠져 나가면 바로 산으로 접어든다.

사실 굳이 문이 필요할 것도 없었다.

문만 있고 보다시피 담장도 없는게...

 

 

 

 

 

 

 뒤 돌아 본 석골사

 

 

 

 

4. 세상에서 가장 긴 밤.

 

 절을 뒤로 한지 30분도 지나지 않았다.

산길로 이내 어둠이 내렸다.

 

 

 

그나마 챙긴 작은 손전등은 왠만하면 켜지 않으려 했으나 산 골의 6시는 밤이었다.  그것도 칠흙이었다.    등로는 계곡으로 이어졌으며 간간이 보이는 이정표와 앙상한 나뭇가지 끝에 매어달린 리본이 위안이었다.    운문산 바로 아래의 작은 암자인 상운암까지는 가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내민 내 손조차도 볼 수 없을 지경이 되자 비박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그건 생각 뿐이었다.   어느 바위 앞의 이정표는 갈림길에서 운문산을 가르켰고 객은 그 길을 따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 나오고 만다.   계곡으로 연결되었는데, 길이 없었다.  그러다가 다시 들어갔다가 여전히 길을 못찾고 되돌아 나오기를 수 번, 손전등 빛 방향 이외는 전혀 사물을 구별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석골사까지 아니 마을까지 다시 내려가서 날이 밝으면 오르느냐 하며, 고민에 잠겼다.    그렇지만 '여기까지 어떻게 2시간을 올라왔는데...'

 

갈림길에서 이정표가 가르키지 않는 급사면으로 올랐다.  그 곳에도 길은 있었다.   허나 그 길은 일반적인 등로는 아니었다.  두 손으로 바위를 오르기도 했고 나뭇가지를 간신이 붙잡고 다리를 나무 둥치에 감으며 잘못 올라왔던 바위를 어렵사리 다시 내려서고 했다.   그러니까 이정표가 가리키는 길은 일반 등로 였던 반면에 여기는 험로였던 셈이었다.   

 

 

 

 

 굴 속 비탈진 바위 상단에서 취사를 했다.

석골사를 빠져 나온지 2시간 반이 지날 무렵이다.

그러니까 칠 흙같이 어두운 산 길을 걸었다.

 

 

바위 굴안에서 밖을 찍었다.

 

 

그러다가 나타난 바위 굴.    이젠 더 이상 오를 수도 물러설 수도 없었다.   등짐을 내렸다.   경사진 바위 굴 상단에서 버너 불을 피우고 데핀 햇반을 라면국물에 말아 깔깔한 입으로 밀어 넣었다.    허기를 채우자 한 잔의 커피가 간절했으나 숙면에 도움이 되질 않으리라 여겨져 바지에 쓱쓱 문질러 사과 하나 베어 문다.     

 

하늘의 별 빛이 뚜렷하나 저 편 능선은 윤곽조차 가름하기 어렵다.   손전등으로 주변을 휘둘러 보다가 이내 껐다.   차라리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게 더 낳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 뭔가 보이는가.

 나도 모르는 이 사진이 어떻게 저장이 되었나.

 

 

 

적막강산, 그리고 고립무원...    챙겨오지 않은 스틱이 아쉽다.   보행용이 아니라 방어, 나아가서 공격 무기가 아닌가.   등산 칼 하나를 바지 주머니에 챙기고는 침낭 속에 몸을 구겨 넣었다.    그리고 이내 누운 채 술을 들이켰다.   두어 번 벌컥거렸던가, 반 이상 비워졌다.   아깝다.   내가 이렇게 술을 잘 마셨던가...   머리 위까지 푹 뒤집어 쓴 침낭 속에서 눈을 감았다.    잠을 자리라는 기대와 달리 아, 어찌 이리도 오감이 뚜렷한가.     

 

 

 

 

 침낭을 뒤집어 쓴 채 직찍.

렌즈에 이슬에 맺혔나 보다.  

이 자세로 세상에서 가장 길었던 밤을 새다.

  

 

 

산을 훒어 내리는 바람소리가 계곡을 빠져 나간다.   그리고 침낭 겉을 싼 비닐이 펄럭인다.   뭔가 다가와서 건드린게 틀림없는 굴 안에 그대로 내버려 둔 코펠과 숟가락이 달그락 거린다.  그 보다는  돌아누운 등 뒤의 한 겹 침낭 밖으로 뭔가 슬그머니 기대고 앉은, 이 느낌은 대체 뭐란 말인가.    움직이지도 못하고 숨소리 마저 삼키면서 그저 바지 속의 칼을 움켜 쥐었다.    

 

세상에서 가장 긴 밤을 운문산 자락의 바위 굴에서 홀로 지새웠다.    그 10월의 마지막 밤을...

 

 

 

 

 

 

팀을 이루어 이 광활한 영남알프스를 한 번에 종주하기도 하더니만 제대로 음미하려면 2박 3일 정도는 걸린다.   허긴 무박 30시간 이니 40시간이니 하여  잠도 자지 않고 산을 타는 이들도 간혹 있더라 만은 그건 산행이라기 보다 변형된 익스트림 스포츠의  일부분이라 보고 싶다.   사실 무슨 봉우리 수집하듯이 정상비 곁에서 사진 한 장 뚝딱박고 재빠르게 다음 봉을 향하여 허둥지둥 가서는 또 다른 인증샷과 몇 시간 주파... 운운하는, 그런 모습들을 지켜 보는건 그리 편치 않다.   여전히 논란 중인 히말라야 14봉 여성최초 등정 운운하는, 되먹지 못한 일등주의 다 그렇진 않겠으나 객이 생각하는 산행과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부정하지 못한다.    모든 분야가 다 그렇지만 산행 역시 개인차가 있다.   체력도 달리거니와 적당히 힘겨운 발걸음과 저 편 능선과 마루 그리고 골을 쳐다 볼 때 어느 듯 마음으로 자리하는, 무념무상... 아마 이걸 즐기는 객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