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굴을 가다 090228
<설레임>
모처럼 갖는 FT들과의 산행 모임이다.
공지를 보긴 했는데 혹 잘못 알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미덥지 않은 생각이 든 건,
환승버스를 내린 도선사 주차장에서 모임 장소인 ‘마운틴 월드’ 사무실로 이르는 도로변으로 늘어선
가게들이 아직은 오픈 전이라 너른 도로가 한산한 건 그렇다손 치더래도,
이쯤해서는 한 둘의 낯 익은 일행들이 보일 법은 한데
단 1명의 산객조차 눈에 띄질 않는다.
이월의 마지막 날,
뺨을 스치는 북한산 자락의 아침 공기엔 지난 날의 매운 맛은 커녕
연한 봄이 묻어 있어 며칠째 느긋하게 몸 풀고 있는 겨울은
더 이상 힘을 모으기 어려울 것 같다.
혹시 하며 챙겨 넣은 우모복과 하드쉘 자켓은 산행내내 배낭 속에 있었다.
讀圖란, 지도의 正置가 제일 중요한데...
독도법에 대해 첫 강의를 하는 원장님.
얼마전, '엄마가 간다'의 단장으로 임자체 원정을 다녀 왔으나 여전히 강건하셨다.
마운틴 월드의 강의실에서 독도법에 대해 원장님의 강의는 이어지고...
<호칭유감 呼稱遺憾>
언젠가 할렐루야 기도원옆의 소귀천 계곡을 통하여 산행을 한 적이 있었다.
우이(牛耳)동 계곡의 순 한글 표현인 ‘소귀’천이라는 명칭이 정겨웠었는데,
이내 고개를 갸우뚱 했다.
그건 계곡을 끼는 등로에 느닷없이 한자로 음각한,
‘素貴山岳會’라는 훤칠한 표석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소박하고 귀한 것을 추구하는…
말하자면 그런 목적으로 만든 산악회려니 하며 짐작을 하긴 했으나,
본 지명의 뜻을 한글로 옮긴 후 다시 전혀 다른 의미의 한자로 표기한,
발칙한 조어가 마음에 걸렸다.
어찌되었건,
'소귀천 계곡'은 오래 전부터 등로의 안내판이나 지도 등에 공식명칭으로 자리잡았다.
그런데, 본 명칭은 ‘긴골’ 이란다.
입구에서 대동문 까지 이르는 골짜기의 길이가 길다고 하여
예전에는 그렇게 불리어 졌는데,
뜬금없는 입석으로 말미암아 소귀천계곡으로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건 억지춘양과 다름 아니다.
소담스럽고 진귀한 계곡 이라는, 호칭 그 자체를 두고 말함이 아니다.
긴골이라는 만만하고 정겨운 이름을,
굳이 왜곡시켜 정체모를 조악한 한자 표석이 이젠 버젓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음에 마음 애린다.
자연적인 산물을 사인의 이기심의 발로로 이용되어서는 곤란하다.
원장님은 설명과 아울러 답답한 속내를 짧게 털어 놓았다.
*
어느 산행기에서,
한 무명의 봉우리를 소속 회원의 닉을 붙여 ‘XX봉’이라고
비닐코팅하여 나뭇가지에 붙여 둔 걸 본 적이 있다.
특별(?)한 그회원에게 무슨 헌정이나 하듯이...
말하자면 ‘ 이건 내 봉우리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라는 걸 뭇 산객들에게 알리고 싶은게다.
근데, 그게 뭐 어쨌다는 겐가.
官도 아닌 극 소수의 사인들이, 대체 그런 권리가 있기나 한가.
사유지도 아닐 터인데...
그(녀)가 또는 그 산악회가 그 곳에 기득권 내지
그 봉우리의 형성과 지역발전에 어떤 도움을 끼쳤는지는 알 수 없다.
아무려면, 그건 중요하지 않다.
풍광좋은 계곡의 바위에 얄궂게 새긴 이름 석자의 흉물을 보는 듯 했다.
가당찮으며 오만하다.
봉우리의 원 이름이 왜 없겠는가.
*
양평에 가면 유명산이 있다.
동으로는 용문산이 뚜렷이 조망되고 산정으로 너른 초원 지대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원 명칭은 마유산(馬乳山) 이라고 한다.
옛날에 산정의 너른 초원에서 말들을 키웠다고 한다.
몇 해전에, 그 산을 측량하면서 일행 중의 홍일점인 여성의
이름을 붙이고 난 후 그리 불리워 진다고 했다.
관이라고 해서 이런 식의 황당한 개명에 대하여 자유로울 순 없다.
*
연인산(戀人山)은 오월이면 가평군에서 개최하는 연인산 축제를 관광코스로 개발하여 홍보를 한다.
정상에 가면 ‘사랑과 꿈이 이루어지는…’이라는 문구의 거대한 입석이 위압적이다.
몇해 전에 가평군에서 명칭을 공모하여,
기존의 명칭인 우목봉을 끌어내리고 연인산으로 개칭하였다.
소망능선이니 우정능선, 장수능선이니 하는 시덥지 않은 능선의 등로명으로 죄다 바꾸고...
난, 연인산이라는 명칭이 도무지 와 닿지도 않을 뿐 더러,
잘 생긴 산세에 견주어,
개명이 조잡스럽다.
실없는 개인의 허망한 욕망에 경계심 마저 생기며,
지형의 생김새 또는 쓰임새에 따라 자연스레 붙여진 옛 명칭이 훨씬 다감하다.
*
긴 가뭄임에도 몸풀은 계곡은 시냇물을 끊임없이 흘러 내리고
계류를 건넌 선두는 한적한 우측 사면의 능선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긴골의 계류는 여유롭다 못해 낭만적이다.
결코 가볍지 않은 스트레칭 덕에 산걸음은 가볍다.
긴골의 우측 사면으로 접어들었다.
진달래와 철쭉의 구별은, 그리고 산철쭉도 있는데...
진달래는 꽃이 먼저 피고 난 후 질무렵에서야 잎이 나오고,
철쭉은 잎이 먼저 핀다는 말씀.
그리고, 산철쭉은 꽃과 잎이 함께 피며 지리산의 바래봉에서 많이 볼 수 있으며
개화시기도 진달래와 철쭉 사이에 산철쭉이...
산행 중, 휴식을 겸할 때 마다 원장님의 강의가 있었다.
근데, 수강하는 표정들이 너무 진지하다.
성곽을 올라서기 직전의 일행들
용암문에서...
노적봉 아래의 안부(鞍部)
<노적봉 露積峯>
노적봉의 서봉을 오른다.
보조자일을 잡고 오르는 동작에 다들 거침이 없다.
다행히 바람은 불지 않았고 개스 마저 없어 거칠 것 없는 사위가 시원하다.
한반도의 기운을 쇠하게 한다며 일제가 박은
쇠말뚝을 뽑아 내었다는 상흔이 선연한 물웅덩이를 중심으로 빙 둘러 앉았다.
정성들여 준비해온 찬들이 달디 달다.
급히 나서느라 찬을 챙기지 못했는데, 그 덕에 입이 호강이다.
가끔씩 깜박이는 어설픔이 드물게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서봉에서 우연히 만난,
새로운 바위길을 낸다며 작업하는 후배 둘은
연장을 둘러 멘채 단애로 내려진 자일을 타고 사라졌다.
‘길 잘 만들어…조심하고… 내가 곧 확인 할꺼여…’
따사한 햇살이 내리는 서봉 정상에서 독도법 강의는 이어졌다.
보현봉과 백운대가 정확하게 남북으로 위치하며
그 사이를 노적봉이 자리하여 거의 일직선으로 함께 그을 수 있었다.
미처 몰랐다.
그렇다면...
일제가 박았다는, 그리고 뽑아내었다는,
쇠말뚝의 정체도...
뭔가 속 얘기가 있겠구나.
흥미롭다.
새 바위길(하늘길)의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는 기철이 기택이 형제를 우연히 만났다.
액정이 뚫어져라 포커싱을 하는 산순이님.
인터뷰 리포터로서의 활약이 기대됩니다.
(원장님으로 부터 인터뷰어로서 제의를 가뿐히 수락하던 저력이 기대됩니다)
독도법에 대한 노적봉 정상에서의 현장 강의는 계속 이어지고...
책상을 펴고 필기까지 하며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수강을 하는 너무나 모범적인 일행.
백운대와 인수봉을 배경으로...
까만 안경의 품세가, 흡사 외화 '매트릭스'의 스틸 컷 같다.
이번엔 뭘 담길래, 저리도 싱글벙글 하는겐지...
래펠링으로 서봉 내려서기
<위기일발>
여우굴로 가는 너덜길 사면의 중간을 올라서는가 했다.
왼발 아래가 허물어지며 커다란 돌멩이 하나가 굴러 떨어진다.
손으로 받아 제지를 하려고 했으나, 여의치 못하다.
이미 잃어 버린 몸의 균형은 원치 않은 다른 방식으로 균형을 잡아 나갈 뿐...
완벽하게 뒤로 넘어 지며 배낭을 진 등이 사면에 닿았을 땐,
머리를 숙이며 차라리 몸을 말아야 한다.
온전하게 뒤로 한 바퀴를 돌며 굴러 내려가는 시간은 짧았으나
가슴부분이 급사면에 닿자, 이내 사지를 뻗친다.
멈췄다.
짧은 생각이 얼른 머리를 지나친다.
재빨리 일어서면서,
“괜찮습니다.” 라며 낙엽이 묻은 옷을 수습하는 시늉을 했다.
돌이 잔뜩 깔린 사면에서,
갑자기 벌어진 돌발상황에 대해 멀뚱히 지켜 볼 수 밖에 없는
일행들의 걱정이 걱정스러웠다.
저 아래의 일반 등로엔 산객들이 부산하게 오르 내리고 있었다.
<여우굴과 백운대 허리길 트레버스>
염초봉의 하이라이트 구간인 말바위 트레버스 구간이 좌측으로 쏟아 있고
굴 바로 위의 잔뜩 그늘진 직벽 응달을 바로 올라서는 백운대를 사이에 둔,
꿀르와르(Gully)의 상단에 위치한 여우굴은 늘 그랬다.
굴을 빠져 나오는게 만만한 것 같은데, 이게 그렇지가 않다.
온몸으로 비벼야 겨우 들어가서는 나오는 구멍도 그렇거니와 굴을 오르 내리는 동작은,
잡고 디디는 홀드도 애매하여 포근한 굴 밖의 날씨와는 다르게
여전히 꽁꽁 얼은 발디딤이 영 미덥지 못하다.
손발과 등으로 얼음장 같이 차고 매끈한 바위를 사정없이 밀어 붙이는,
짝힘을 얻어 겨우 지탱하며 까치발로 내려선다.
'다들 내 보다는 덜 힘들었을꺼여...'
바위 굴 속을 들락거리는 쉽지 않은 동작이 오히려 재미있는 놀이인 듯,
즐거운 표정들이 일행들의 온몸으로 가득하다.
굴을 되돌아 나와 이내 이어진 백운대 허리 길은
굵은 와이어로 재 정비를 하여 안전을 보강 했으나
바위 사면을 트레버스하는 동안은 조금도 긴장을 늦출 수는 없다.
멋들어진 풍광을 담으려고 디카 포커싱을 하더라도 잡은 와이어를 놓아서는 안된다.
설사 바위 벼랑아래로 디카를 떨어뜨린다 하더래도…
뒤에서 잠시 긴장을 했다.
노적봉아래의 산성길 등로로 내려서기 전에 잠시 산행 등로를 계획 중에.
여우굴속으로 잠입
좌측의 여우굴로 들어가기 직전
백운대 허리길을 트레버스 한다.
10미터 남짓한 고정 볼트 사이는 1사람씩 건너야 한다.
그건 2명 이상이 건너게 되면 사람마다 힘쓰는 순간이 제각각이어서
와이어의 출렁거림으로 리듬을 놓치게 되며 자칫 예기치 못한 상황이 닥칠 수가 있다.
바위 단애에서의 조망은 일반 등로에서 장애물로 인한 시선에 막힘이 없다.
위문으로 내려서기 전의 백운대 남측 아래의 뷰포인터.
정면으로 노적봉의 동봉과 서봉이 나란이 서있으며 그 뒤로는 의상능선이,
그리고 저 멀리로는 비봉 능선의 코뿔소 두상의 바위가 실루엣으로 보이며
좌측 끝으로 보현봉의 자태가 헌걸차다.
하산 중에 내려다 본 회색빛 숲의 전경
<뒷담화>
좋아하는 산행도 하면서 용품을 제공 받아
산행기를 올리며 아울러 용품의 장단점을 기록하는 일석이조의 테스터로서,
우연하게 연을 맺었다.
“마치 가족 같애.”
독도에 일가견이 있는,
매주 오지의 산을 찾는 일행이 산행 중에 한 얘기가 머리 속에 뱅뱅거린다.
산두부를 안주하며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이런저런 정담들이 있었다.
면면들이 여전히 만만치는 않으나,
여타의 모임과는 또 다른 성격의 모임이다.
재밌다.
그리고,
배울게 많다.
*